- 부모 자식의 연결고리, 애정과 사랑. 랭스턴 휴즈 '엄마가 아들에게'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는 삶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맞기 위한 나이 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당사자들만의 모임이었지만 지금은 그 가족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시를 읽는 모임 혹은 꽃꽂이 모임 같은 일상 속의 사교 모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들다운 아름다운 준비라는 생각을 늘 한다.
'단사리' 언제부터인가 내가 머릿속에 넣고 하나씩 실천하는 일상의 모토다. '단' (斷, 끊을 단) - 이제는 서서히, 조금씩 내 사회생활 속의 관계도 끊어나가고 그렇게 정리를 한다. 내 주변을 단정하게, 아니 깔끔하게 만드는 가지치기 작업이다.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일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는 단연 제일 먼저 끊어내기를 한다. 이제 그런 부정적인 관계의 유지는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사' (捨, 버릴 사) - 하나씩 둘씩 물건부터 버린다. 특히 우리 동양인들의 절약정신 속에서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어느새 물건을 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당장 나도 그렇다. 도무지 버리지를 못한다. 그것이 절약 때문이든 미련 때문이든 미래의 어느 때를 위한 만약의 대비이든, 아무튼 결과는 동일하다. 물건이 내 공간을 부당하게 점유, 잠식하고 있다는 것. 이제는 과감하게 버린다, 이미 다 버렸다.
물론 물건만 버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허황된 꿈과 허망한 바람과, 이유 부족한 자만 혹은 오만도 버리려 노력한다. 역시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버렸다. 조금은 더 가벼운 몸과 마음이 되었다.
'리' (離, 떠날 리) - 기존의 익숙했던 것들로부터 떠나는 연습을 특히 많이 한다. 사람들로부터 떠나고 물건으로부터 떠나고, 상황과 환경으로부터 떠난다. 내가 떠나는 것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내게서, 나의 공간에서 떠나보내는 것까지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하지만 익숙함, 그 편리함으로부터 멀어지기란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더 애쓴다.
하지만 결코 단사리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다. 끊을 수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떠나가게 할 수도 없다. 하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맞다. 나의 정서에 맞고 내 본능에 맞고, 순리에도 맞다. '순천자흥 역천자망'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 흥할 것이요 감히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 망할 것이니)이라 했다. 굳이 인생의 말년에 망할 생각은 없다.
요즘은 듣기 힘든 얘기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사실 주변에서 그런 얘기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늘 기분이 나빴다), '자꾸 그러면 호적에서 파버린다?' 이런 얘기를 예전에는 사람들이 종종 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겠으나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불경하고, 자연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다. 사실 생물학적인 친자관계는 어떤 방법으로도 서류상에서 파버릴 수가 없다. 서류에서 없어진다 한들 뭐 그 원초적 관계가 없는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의 첫 부분 (first name, given name, 우리로 말하면 성 빼고 그냥 이름)을 살짝 변형해서 자식 이름의 중간 이름 (middle name)으로 쓰는 나라가 있다. 러시아를 포함하는 슬라브어권의 나라들이 그렇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첫 이름이 미하일 (러시아어 Mikhail, 불가리아어 Mihail, 벨라루스어 Michail)이라고 하자. 성경에 등장하는 대천사 미카엘 (Michael)의 그들식 표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 첫 이름이 바로 이 미하일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이름은 표도르다. 그러니까 그의 풀네임은 이렇게 된다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첫째 아들 이반의 경우에는 이런 풀 네임을 갖게 될 것이다 - 이반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 (그의 그 무정한 아버지의 첫 이름이 표도르다).
자 그러면, 스탈린의 정식 풀 네임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의 퍼스트 네임은 무엇일까요? 네, 비사리온입니다.
'그 이름으로 연결되는 아버지와 아들' 나는 이 글을 쓸 생각을 하면서 글의 제목을 이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세태를 의식해서 위에 보시는 제목으로 바꾸었다. 이름 속에서 연결되는 아버지와 아들, 나는 그저 마음이 따뜻해진다. 숙연한 마음도 든다.
혈통을 따지는 그들의 본능적 습관이 이런 문화를 만든 것이리라. 표도르? 우리 러시아에 표도르가 어디 한 둘인가? 어떤 표도르? 아 그 미하일네 집 자식 그 표도르? 그렇게 말해야 알지, 그냥 표도르 하면 내가 알아먹나 어디?
잔 다르크? 아 그 다르크씨네 집 딸 조앤? 참으로 당차고 용기 있는 아가씨지!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어떤 빈센트? 아, 그 고흐 지방 출신의 그림 그리는 사람? 알지, 내가. 선한 사람이야. 그림으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문제지. 그의 그림은 안 팔려, 왜인지는 나도 모르지. 아무튼 팔리지 않아. (반 고흐 살아 있을 때 팔린 그림은 단 한 점이었답니다)
좀 다른 방식인데 그 취지는 동일한 경우다. 서구에서 쓰는 성 맥도널드 (McDonald)는 바로 '도널드의 아들' (Son of Donald)의 뜻이다. 존슨 (Johnson)도 마찬가지다, 존의 아들 (Son of John)의 의미이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딴/부친 혹은 조상의 이름을 나타내는' 이런 뜻의 '패트러니믹' (patronymic)이라고 한다.
굳이 우리의 경우를 말한다면 '본관' (본/관향)이 조금 그와 유사한 취지라고 할까? 그러나 이 경우는 따로 한 단계를 더 묻고 그렇게 더 나아가야 비로소 도달하는 세부 정보다. 이름 그 자체에 그 정보가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처럼 자식을 사랑하고 늘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런 시각으로 보기도 합니다 - 그렇게라도 자식과 연결되고 싶은 부모의 애뜻한 심정의 한 표현이라고. 그래서 좋다고, 사랑스럽다고 그런 이름 짓는 방식 자체가. 우리도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지으면 그것도 좋을 것이라고.
오늘의 시를 본다.
얼마 전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당부의 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말은 또 조금 그 결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 기본 마음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똑같을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들의 행복과 건승을 간구하는 그 절실한 아낌의 마음.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 그들의 사랑을 이길 존재는 이승에는 없다.
엄마가 아들에게 (Mother to Son)
- 랭스턴 휴즈 (Langston Hughes)
자, 아들, 엄마가 네게 이르는 말이다 :
이 엄마의 삶은 결코 수정으로 만들어진 계단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단다.
곳곳에 날카로운 압정이 있었지,
파편들이 널려있고,
바닥은 다 찢겨져 있었고,
마루 어디에도 카펫은 없는 그런 곳들이었어 -
그저 견뎌냈지 ;
나는 끊임없이 험한 계단을 걸어 올라갔어,
그렇게 목적지에 도달했지,
수많은 모퉁이를 돌아서,
때로는 어둠 속을 걸어갔지,
그곳에는 불빛 하나 없었어.
그러니 아들아, 결코 등을 보이며 물러서지 말아라 ;
힘없이 계단에 주저앉아 있지 말거라,
너는 그때 그 순간 그냥 조금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것 뿐이니까 ;
지금은 낙담하거나 굴복하지 말아라 -
나는 여전히 계속 나의 길을 갈 것이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갈 것이니까,
나의 삶은 결코 수정 계단이 아니니까.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