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이미 모두가 부처, 다만 그것을 모를 뿐. 백석 '수라'
철학자 스피노자 또한 신에 대해 말합니다. 신은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왜 유대교에서 파문을 당했을까요? 그가 말하는 신은 자신의 뜻과 의지를 가지고, 뚜렷한 목적과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무언가를 행하고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내재된 본성에 의한 필연성에 따라 그리하는 것 뿐입니다. 또한 그의 신은 인간 혹은 다른 존재들과는 애초부터 구별되는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가 만들어낸 존재들은 자연스럽게 신인 그의 특성의 일부를 갖게 됩니다.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스피노자 자신도 그렇게 말합니다) 신 그도 다른 존재들의 속성을 그렇게 가진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는 만들어내는 존재 (그가 말하는 소위 '능산적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소산적 자연')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스피노자의 신은 다른 세계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존재들과 같은 세계에 그저 함께 있습니다.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신의 불가침적 뜻과 목적에 따라, 인간들과는 애초 구별되는 초월적인 전지전능의 존재로, 그렇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신의 개념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개념이지요. 그러니 그렇게 철저하게 그리고 무섭게 파문당한 것이지요.
지금껏 저는 불교의 세계에는 석가모니불 단 한 분의 부처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서요? 물론 고타마 싯다르타가 35세 때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고 그렇게 불교가 창시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부처는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을 것이며 그래야 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과거칠불, 5억 7천만 년 후 이 세상에 오신다는 미륵불, 그리고 아미타불 등 여러 많은 부처의 등장을 말합니다. 저는 이것의 배경이 되는 그 논리적 근거에 더 크게 놀랐습니다. 참으로 설득력 있고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 타당성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 혹은 미래 그리고 이곳 또는 저곳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그 말은 곧 많은 다른 부처의 등장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타당한 주장 아닌가요? 불교가 이렇게 논리적이고 개방적 자세의 종교였나, 새삼 놀라는 계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복병을 저는 만납니다. '이 세상 오직 나 만이 홀로 귀한 존재다', 이렇게 해석하면 제가 지금까지 기분 좋게 이해한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나는 애초 중생 너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야. 그저 나 혼자만이 귀하고 귀한 존재인 것이지!' 훗날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석가모니불이 되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말 맞아? 자기 자랑 아닌가,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하는 말이라니?
그러나 저는 며칠을 좀 더 찾아보고 사유하고 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니, 그건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야. 오히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지 - '애석하구나, 중생들이 여전히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때에 오직 나만이 깨달음을 얻어 결과적으로 나 혼자만 귀한 존재가 되어있구나. 오호통재라! 내가 중생들을 벌하고 그들에게 상을 주고 그들을 위해 특별히 무슨 은덕을 베풀고 그럴 것은 아니지만, 이미 내가 얻은 그 큰 깨달음을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대중들과 나누는 방식으로 그들도 머지 않아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나는 그들을 도울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다.' 사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들은 이미 부처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불교의 세계에 대한 저의 이런 급관심은 백석 시인의 시 '여승'을 읽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평소 불교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 세계도 제게 영향을 주었구요. 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승려 소설가 김동성의 시 '눈 오는 밤'이 결정타였습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반야/번뇌/내게는 버릴 세상도 없다/한 번도 정식으로 살아보지 못한 세상/그립다, 사람들이 보고 싶다/외로움과 그리움은 배고픔보다 무섭다' 뭐 이런 구절은 저의 마음을 붙들어 매어 버렸지요.
그때 저는 다시 백석 시인의 시 한 편을 만납니다, '수라'. 그런데 시인은 왜 시의 제목을 수라라고 했을까요? 제가 본 모든 설명들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수라는, 중생이 그 업보에 따라 윤회하게 된다는 여섯 세계 중 하나인 '아수라의 세계 (아수라도)'를 말한다. 시에 나오는 거미 가족들의 경우처럼 가족 공동체의 가슴 아픈 해체를 강요하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수라장이라고 말할 때의 그 상황을 연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런 해석에 의견을 크게 달리 합니다. 하나, 시인은 분명 수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어 글자 하나하나의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시의 특성에 비추어, 그리고 가히 언어의 귀재라고 우리가 말하는 이 시인이 이렇게 허투루 아수라를 그저 수라라고 줄여말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시인 백석을 너무 작게 보는 것입니다. 둘, 이 시 어디를 보아도 그 상황이 뭐 난리가 나고 가족들이 뿔뿔이 가슴 아프게 헤어지고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거미를 밖으로 내보낸 시인도 나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강요나 강제, 설움과 압박, 비극적 상황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쓰고 있는 단어 '수라'는 그냥 수라입니다. 수라 (Suras)는 '자애로운/인정 많은/신 혹은 신성의 영적인 상태를 가진' 이런 의미입니다. 지극히 긍정적인 덕목을 의미하고 때로는 깨달음, 득도 또는 지혜를 뜻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반야'와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의 내용에 비추어 크게 무리가 없는 해석 아닌가요?
처음 시인이 방바닥에서 발견한 새끼 거미 한 마리, 그 후에 나타난 큰 거미, 그리고 또 보이는 무척 작은 새끼 거미, 시인의 눈에는 이 미물 거미조차도 나름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집니다. 물론 자신에게 별다른 악의도 없었고 사실 그럴 이유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방 밖으로 몰아낸 자신의 처사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밤을 추운 바깥에서 보내게 될 그들 거미 가족이 그저 안스럽습니다. 부디 밖에서 얼른 다시, 막내 걱정하고 있을 엄마와 누나, 형을 만났으면 좋겠다 하며 슬픔마저 느끼고 있는 시인.
시인 백석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까 문득 궁금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의 시에서는 가끔 불교의 향기가 배어 나왔기 때문이지요. 또 어떤 시에서는 살짝 기독교적 구도의 자세도 보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인은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하는 저 나름의 여러 이유는 있습니다. 오히려 이 시인은 그저 사람을 사랑하고 우주 자연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람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가진 그런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종교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시에서 그가 보여주는 그 측은지심을 보세요. 사실 몇 년 전부터는 저도 욕실에 들어온 큰 거미 한 마리도 조심스럽게 비닐봉투를 이용해서 안전하게 밖으로 보내줍니다. 다른 거창한 뜻과 의도는 없습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작은 미물 하나도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굳이 그들을 해해야 할 이유나 필요성이 없다는 자각 이런 것에 기인한 행동의 변화이지요. 그런 제 모습이 저는 좋았습니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의 이런 작은 행동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결국은 지금 우리 사는 이곳을 조금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있습니다.
'나 혼자만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그래서 나 혼자만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그 미안한 마음에 중생들도 자신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어주는 석가모니불, 일상 속의 철학하기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평생 그것에 몰두한 선한 마음의 불쌍한 철학자 스피노자, 거미 몇 마리 방 밖으로 '고이' 내보내고도 그것이 못내 가슴 아픈 여린 마음의 소유자 이 시인, 맹자님이 말하는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의 소유자들입니다. 아름답고 고마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