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정체, 그는 아니 그녀는 누구인가

- 알면 이긴다, 알아야 이긴다! 남정림 '솜사탕 같은 너'

by 가을에 내리는 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세 형제가 등장한다. 미차 (드미트리), 이반 그리고 막내 알료사. 나는 그 소설을 어느 해 무더운 여름날 (사실 4월부터 시작해서 8월의 말까지 거의 다섯 달 동안) 내리 다섯 번을 읽은 때가 있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나의 일상은 그야말로 괄목상대, 많이 달라졌다. 내게 특히히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알료샤 (소설 속의 그의 나이는 19세-20세)였다. 나는 두려움을 보는 그의 시각을 배우려 애썼다. 많이 배웠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뭐 대단히 크고 엄청난 것 같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우리는 그런 시시한 것들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실상이 그렇다.


하나, 불편함 아니 불편함의 가능성이다. 내가 그동안 그리고 지금도 편안하게 느끼고 있는 그 익숙함이 자칫 내 일상에서 사라질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혹시 아나?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이 오히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 "임자, 해봤어?" 예전에 모 그룹의 회장이 임원들에게 늘 했던 말이라고 한다.


둘, 쪽팔림에 대한 우려다. 이 부분은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크게 작용한다.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 잘 보이고 싶은데? 그들은 아마도 내가 대단히 잘난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을걸? 실상이 들통나면 어쩌지?


다음 주에 있을 뉴욕 본사 최고경영자 방한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하는 임원이 있다고 하자. 혹시 삐끗 잘못하면 어쩌나? 벌써 지난주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밤잠도 설친다. 자, 한번 살펴보자. 이 경우의 내가 각오해야 할 위험의 최대치는 무엇일까? 그래, 프리젠테이션을 기대만큼 못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내가 잘리나?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안다. 그럼? 연봉이 깎이나? 이것도 아닐 것 같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정작 그들은 그의 그날 프리젠테이션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정말 작정하고 말아먹는 경우가 아니라면, 혹은 진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한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라면 (사실 그러기는 힘들다) 그냥 거기서 거기다. 그럼 왜? 그저 내 얼굴 깎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 그것이다. 그래, 좀 깎이면 어떤가? 그거 금방 잊혀지고 금새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이슈가 떠오른다. 세상 일이 그렇다.


이런 방식으로 '위험의 크기를 계량화 (Quantifying the risk)'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막연히 그저 상상 속에서, 관념적으로 떠돌던 그 위험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경우의 수치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일본의 통계학자 카오루 이시카와의 '이시카와 다이어그램' 혹은 '생선가시 다이어그램'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있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선뼈 그리듯이 상세하게 적어본다. 그리고 그 각각에 대한 해결방안도 함께 명시한다. 관념과 상상이 그림으로, 숫자로 변환되는 순간이다. 막상 이렇게 하나하나 적어나가다 보면, 우리의 우려가 우리의 두려움이 침소봉대된 것이었음을 금새 알게 된다. 마음이 놓이기 시작한다.


셋,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빼앗길까 두려운 것이다. 또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해보아야 한다. 우선 내가 애초 너무 크게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다음, 내가 걱정을 하든 하지 않든, 나의 두려움의 크기가 크든 작든, 그것들은 나의 우려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의 인식.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고 잃을 것은 잃게 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는 자칫 '이중의 재난 (double misfortune)'으로 귀결된다. 우려했던 손실이 일어난 것, 그리고 결국은 이리 될 것을 쓸데없이 마음쓰고 두려움에 잠 못 이룬 것!


넷,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을 것에 대한 우려. 어쩌면 차라리 이 부분은 위의 세 가지 경우보다 더 솔직하고 공감이 간다. 그러나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물렁물렁한 것은 아니다. 그냥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신체에 큰 상처를 입을 경우의 수 또한 지극히 예외적이다. 그저 습관적인 우리의 우려 그리고 그에 따른 두려움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두 사람의 경우를 한 번 보자. 우선 지크프리트. 그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 태어난 것일 수도 있고 성장 과정에서 얻어진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숲에서 산 채로 곰을 잡아서 목덜미를 잡고 집으로 끌고 온다. 기겁을 하는 같이 사는 사람의 표정과 반응을 그저 재미있어 하면서, 그리 데리고 놀다가 다시 숲으로 돌려 보낸다. 그는 두려움을 몰랐기에 용으로 변신해 있는 거인 파프너를 단칼에 죽여버릴 수 있었다. 두려움을 몰랐기에 신의 딸인 여걸 브륀힐데를 영원의 잠에서 구해내고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움을 몰랐기에 그는 허무하게 죽어야만 했다. 정말 싱거울 정도로 그리 허망하게.


그 정반대의 인물이 있다. 그를 갓난아기 때부터 키워준 난장이 미메다. 그는 두려움으로 똘똘 뭉친 존재다. 두려움 때문에 어두운 지하 동굴 자기 공간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평생 햇빛도 신선한 공기도 포기했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 저러면 또 어떻게 될까, 늘 그렇게 근심걱정,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허무하게 지크프리트의 칼에 단번에 죽는다. 허망함의 극치다.


두려움의 정체? 하나,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허울 좋은 솜사탕. 둘, 대부분 내가 만들어낸 내 작품이라는 것.


손으로 슬쩍 쥐면 그냥 작게 찌그러진다. 용기 내어 입으로 빨면 내가 놀랄 만큼 사르르 이내 녹는다. 물론 진짜 솜사탕처럼 그런 달콤함은 없다. 그래도 명색이 두려움 아닌가? 씁쓸할 것이다, 90% 카카오 함량의 다크 초콜릿처럼 그렇게. 내가 만들어낸 것이란 말에 결정적인 힌트가 숨어있다. 내가 만든 나의 작품이니, 사실 나는 그 놈을 다루는 기술이 내 안에 있다. 그동안 내가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애초 내가 만들었으니 이제 내가 다르게 변형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면 이제 두려움을 다룰 준비는 거의 다 끝난 것이다. 준비를 마쳤으니 실전으로 들어가면 된다.


아예 두려움을 느끼지 말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안다. 그저 두려움이 기고만장,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그 꼬리를 물고 그렇게 활보하는 꼴을 그냥 앉아서 보고 있지는 말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결국 두려움의 주인은 나다. 나여야 한다. 우선은 두려움의 크기를 계량화 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의 최악은 무엇일까?' 그리고는 내가 꼭 함께 가야만 할 그런 소수의 두려움만을 내게 남겨두자. 그런 식으로 내가 나의 두려움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자. 당장 두려움을 대하는 나의 자세부터 달라질 것이다. 나를 보는 두려움의 태도 또한 크게 달라질 것이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지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아래의 시는 내가 지금껏 길게 말한 그 모든 것을 단 몇 줄로 통쾌하게 보여준다.


솜사탕 같은 너

- 남정림

솜사탕 같은 너는

내 안에 살고 있지


솜사탕 같은 너는

부풀어 오르면

크게 보이지만

손으로 뭉치면

한 줌도 안되지


솜사탕 같은 너는

빛이 세게 비치면

사르르 녹아버리지.


<시의 맨 끝, 마지막 문장에만 마침표가 있는 것이 내 눈길을 끈다. 마침표/피어리어드 (Period! - 그것으로 끝, 종결!), 이 마침표 하나가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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