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어른, 정원을 가꾸듯. 정현종 '방문객'
내년이 되어야 유치원에 들어가는 어린아이와 함께 베이비시터 (부모 외출 중에 아이를 봐주는 사람)가 길을 건넌다. 당연히 횡단보도를 이용한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아이에게 조곤조곤 설명한다. 우리가 왜 꼭 이 횡단보도만을 이용해서 건너야 하는지/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위험이 우리에게 올 수 있는지/왜 그저 가까운 곳 아무데서나 건너면 안 되는 것인지/이런 규칙은 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아이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베이비시터는 늘 그렇게 말한다. 물론 그 아이의 부모가 베이비시터에게 요구한 것 중의 하나이다. 프랑스 얘기다.
그들은 아이를 당당한 '어린 어른'으로 본다, 늘 그렇게 대한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가만 들여다보면 정확히 맞는 말이다. 동일인을 놓고 볼 때 어린아이 시절이 먼저 있었나 아니면 어른이 된 시기가 그 앞에 있었나? 그리보면 사실은 어린이가 뒷날의 어른의 선배이자 고참인 것이다. 그가 앞서 먹은 밥그릇의 수가 어른이 된 자신보다 훨씬 많다. 아, 그에게는 이미 먹은 이유식도 있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져서 난감한 아이들을 자주 보지는 않아도 된다. 식당에서 호텔에서 비행기 안에서 조차, 그저 막무가내 생떼를 쓰는 아이들. 더 참아내기 힘든 것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보고만 있는 부모. 도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 것일까, 떼를 쓰는 아이도 그저 줄기차게 웃어 넘기고만 있는 그 아이의 부모도? 결국은 아이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방임과 방관이 그들을 욕되게 하는 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왜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되는지를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천기누설이 두려워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음이다. 게으름이다. 아이 무시하기에 다름 아니다, 그 귀한 자기 자식인데? 남을 위한 배려와 예의? 내가 솔직하게 말한다면 사실 그건 그 다음 문제다, 우선은 내 아이를 위해서 그리 해야만 하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도 그냥 알게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그리 많지 않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알려줘야 한다. 부모의 의무이자 도리이다. 그것이 진짜 자식 사랑하는 길이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든 지금도 후회되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시험문제 하나 더 맞히겠다고 교과서를 몇 번이고 더 본 일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는 면에서는 잘한 일이다. 하지만 '그 열심'이 꼭 그런 식일 필요는 없었다. 우선 순위를 가진 다른 것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때 내가 몰랐을 뿐이지. 물론 내게 그런 자유로운 선택이 허용되지도 않았지만! 내 삶의 밭을 그때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내일을 위한 준비를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다른 채널에서 '일상 속에서 철학하기'라는 프로그램을 나름 열심히 만들어 요즘도 부지런히 올린다. 당연 조회수가 많지는 않다. 길고, 고리타분한 주제를 다루고 자극적인 멘트나 눈을 사로잡는 썸네일도 없다. 그저 나의 열심과 진심을 담아 내용으로 승부한다. 나의 개똥철학이다, 누가 그걸 알아주나? 오불관언, 조회수가 구독자가 많은 들 적은 들, 작금의 내 삶이 뭐 그리 크게 달라질 것인가? 혜안 있는 분들이, 단 몇 사람이라도 듣고 공감하고, 그래서 그분의 삶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오유지족!
내가 말하는 철학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본래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를, 무언가 새로 알아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 (필로소피 - 소피아 <지혜/알아가는 것>, 필로스 <사랑하는 것>)'이지 않은가?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이 말. 그저 말하기 위해 말하고, 그때그때의 말장난에서 이기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당시의 수많은 소피스트 (궤변론자 Sophist)들에게 비아냥 거리듯 한 말이다. 물론 생각만 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산다면 아마도 조만간 큰 문제들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생각 좀 하고 삽시다!'
프랑스의 초등학생들, 그리고 우리의 초중등학생들. 역설적인 것은 후일 정말 학문의 한판 승부, 아니 이 정도로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할 때, 정작 과거 내내 학원에 가느라 다른 것을 못한 우리네 그 초중등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일찍, 그저 빼먹기만 한 탓이다. 프랑스 초등학생들은? 차곡차곡 내일의 그날을 위해 준비했다. 퇴비 거름을 주고,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하고 생각을 하고 철학을 하고, 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공부하고. 결코 당장 편하자고 네비게이션을 쓰지는 않는다. 물어 물어서 찾아간다, 매사 그렇게 접근한다. 일이 되도록 하는 방법/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논리와 사고의 체계와 시스템 쌓기, 이 많은 것들이 그들 안으로 들어와 있다. 이제 필요한 때가 왔으니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쓰면 된다.
영국에서 MBA 과정에 있을 때 같은 프로젝트 팀원 중에 케임브리지 대학 공대 출신이 있었다. 비즈니스 세계에는 당연 익숙치 않은 그이니 처음에는 내게 많이 물었다. 나는 내심 신이 나서 알려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제는 내가 그에게 묻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미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 시스템적 사고, 논리의 흐름의 전개도를 완벽하게 장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밑천은 싱거우리만치 금새 그 바닥을 드러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일단은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었고 그러니 남에게 뻔히 보이게 늘 뒤질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학원과 함께 학원을 내 집 삼아 그렇게 산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초등학생 중학생이 심야 학원에 가느라 저녁밥은 늘 밖에서? 밤 12시가 넘어야 비로소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 그것도 빠른 것이다? 다음 주가 기말고사라 특별히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이것이 그들의 반복되는 일상이다? 오호통재라!
나와 나의 아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이 좋았네? 얼마 전 이런 글을 읽었다.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어느 한국 가족의 얘기다.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의 수학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수학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 "아드님의 경우 불어를 더 열심히 익혀야 합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불어와 수학이요? 네, 적어도 이곳 프랑스에서는 불어를 잘하지 못하면 수학을 잘할 수가 없어요. 여기서는 단순 계산문제보다는 응용문제가 그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추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지요. 이곳의 수학은 거의가 다 '왜?/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해답이?' 이런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합니다. 답만 쓰는 것?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는 그 답이 과연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그것을 봅니다."
우리의 미래이고 우리들의 희망이고, 우리 삶의 근본 이유가 되는 우리의 아이들. 프랑스의 아이든 우리나라의 아이든 저 멀리 어디 잘 모르는 나라의 아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그들이 온다, 그 귀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에게로 온다. 어찌 허투루 맞을 수 있겠나?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이미 와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니 어쩌면 살짝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책무 또한 그만큼 막중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돌리고 그렇게 늘 밖의 밥을 먹게 하고, 그 아이들의 몸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그리 피폐하게 만들 권리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그들에게 꼭 필요할 것들로 그들을 채우고 무장시키는 일이 앞서야 한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 먼저여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당신은 시인의 이 질타에서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가? 그 생각 깊고 여린 영혼의 소유자들이 굳이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어떻겠나 그들이 느끼는 그들의 일상은? 그들은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겠나 자신들의 그 기계적인 삶에 대해서? 그렇지 않아도 부서지기 쉬운 마음 여린 존재들인데, 그렇게 돌리고 돌려대니 어디 온전히 남은 부분이 있겠나? 아마도 이미 많이 부서졌을 것이다! 오호통재라!
그러니 뭐 어쩌라구요? 제게 이리 물으신다면? 글쎄요 그걸 알면 제가 지금 여기 이러고 있겠어요? 이리 대답하면 그저 혼이 날 것이다. 참으로 성의 없는 대답이라고!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현세의 그 큰 게임의 룰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 게임에서 벗어난다고, 그 게임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내게 맞는 다른 게임의 존재 가능성을 힘써 찾아보겠다고! 우선은 익숙하고, 그나마 상대적으로는 여러 여건상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고 그래서 이곳에서의 이 게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그 게임이, 내게는 그리고 금쪽같은 내 자식에게는 영 아니라면? 변화의 길을 찾아야지요? 다른 공간을 들여다봐야겠지요? 지금 지구상에 우리 한반도 이 남쪽에 사는 우리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 멀리 지구 다른 쪽 어딘가에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의 행복을 찾아 잘 살고 있잖아요?
그 민감하고 쉽게 구별할 수 없는 경계선의 어느 언저리, 그 '갈피'를, 어쩌면 그래서 바람만이 겨우 더듬어 알아낼 수 있는 그 마음을, 작금의 내 마음이 그 바람의 흉내라도 내서, 어떻게 해서든 한 번 노력은 해보자, 이렇게 시인은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요, 갈피를 잡기가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래서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도 많지만, 종국에는 우리 마음먹은 바가 있으니 그 마음먹은 대로 우리가 가야만 할 그 본래의 길을 한 번 열심히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결과적으로 그곳에 얼마나 가까이 가든, 그 최종 결과와는 별개로 자신을 흉내내려 했던 것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바람도, 또 자신을 아끼고 어여삐 여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우리의 귀한 아이들도, 그런 노력을 계속해온 나 자신도 두 손 벌려 나를 반갑게 맞을 겁니다, 환대할 겁니다. 우리는 그런 환영받는 귀하고 고마운 방문객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저는 이리 믿는 것이지요. 철학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철학의 영역에 나이는 없습니다. 새롭게 알아가는 것을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철학하는 행위이니까요!
# 갈피 - 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 사이 (어름 - 경계를 나타낼 때 쓰는 말. 두 사물의 끝이 맞닿는 자리/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가운데/구역과 구역의 경계점/사건과 장소 따위의 일정 테두리 안)
# 시인 정현종님 -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시인, 시 속에 철학을 심고 철학이라는 우리에게는 다분히 어려운 주제를 시를 통해 아름답게 풀어내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