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르던 남이 나의 님이 된, 그 든든한 내 편! 문정희 '남편'
아들 녀석이 아주 어릴 때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비디오 전집을 구할 기회가 있었다. 어린 아들은 늘 즐겁게 보았고 나도 가끔은 같이 보았다. 그중에 이런 내용의 비디오가 있었다. '둘이면 혼자보다는 낫다'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두 마리의 무스 (엘크라고도 부른다, 사슴의 일종이다)가 주인공이다. 한 마리는 앞을 보지 못하고 다른 한 마리는 다리가 불편하다. 다리가 불편한 무스가 앞을 못 보는 무스를 자기 등에 태우고 그렇게 그 둘은 그들만의 함께 생존하기를 시작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네 다섯 살의 아들 녀석과 이런저런 얘기를 흥미롭게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철학적 주제의 대화에 관한 한, 아이는 절대 어른인 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벌써 생각까지 고착화된 성인인 나보다 여전히 더 탄력적이고 수많은 가능성에 마음 열린 존재다.
배우자, 나와 삶의 짝이 된 사람을 말한다. 짝이 되어 나란히 가고, 서로 비금비금 그야말로 비견되며 적수 (나쁜 의미가 아니라 맞수, 함께 상대해서 겨루어볼 만한 사람)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짝 우' 자에는 뜻하지 않게 만난다라는 의미도 있으니 우연한 기회에 연이 되어 만나게 된 좋은 사람의 뜻도 있을 것이다.
문득 좀 싱거운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하나, 상대방에게서 배우자, 그것도 적극적으로 고마움 마음 속에. 이 경우 액센트는 그 첫 머리 '배' 자에 온다. 상대방을 우선시 하자. 그에게서 아니 그녀에게서 무언가 좋은 점을 찾아내려 힘쓰자. 그래서 그것을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자. 공자님 말씀에 '삼인행 필유아사'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라 했다. 내 오른쪽에서 걸어가는 선한 사람에게서는 그의 선한 면을 배우고, 내 왼편에서 함께 걸어가는 악인에게서는 나는 그처럼 나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을 배우라는 말씀이었다. 하물며 평생을 함께 살아갈 나의 그 귀한 배우자에게서는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나?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좋은 점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어느덧 존경하는 마음도 갖게 될 것이다.
둘, 가끔은 '배우'가 되자. 이때 악센트는 두번째 음절에 온다. 나를 뒤로 두고 상대방을 먼저 보자, 그의 입장을 우선 생각해보자. 그래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배우처럼 행동할 필요도 있음을 기억하자. 거짓을 말하고 거짓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분명 아와 어는 크게 다르다. 그러니 가끔은 내가 생각한 '아'라고 말하지 말고, 상대방이 고집하고 있는 '어'에 맞장구를 쳐주자. 혹시 아나? 조금 뒤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원래의 아가 아니라 상대방의 어가 더 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이었음을 실감하게 될지?
반려자라는 말도 자주 쓴다. 역시 짝 반 자이고 짝 려 자이다. 짝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따르고 어느 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따라가는, 서로 친구하고 서로 벗하는 그런 관계, 그것이 반려자다. 이 대목에서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과 장면이 떠오른다. 사람이 아닌 동물을 그 상대로 상정하여 쓰는 이 반려의 개념이다. 괜히 좀 거북하고 부담스럽다. 사람 사이에 쓰는 이 고귀한 단어를 동물과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조금은 억울하고 불편한 감정이 든다. 물론 나의 개인적 편견일 것이다.
원래 남편은 배우자 중 그저 남자 쪽에 속하는 사람 (그러니까 남자)을 가르키는 말이고, 그 상대자인 여자 쪽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여편이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접미사 '네'를 붙여 결혼한 여자를 살짝 낮잡아 부르는 말로 쓰는 경우도 과거에는 있었다. 자신의 지아비를 그냥 '여기요, 거기 남자' 하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나? 하긴 내가 읽은 어떤 성경 한글본에 보면 '여자여' 하며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나온다. 이 무슨 낯선 상황인가 보니,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하는 말로 나온다. 영어 성경에는 'Woman'하고 시작된다. 아무리 옛날 신약이 기록된 언어 헬라어 (그리스어)에는 woman이라는 단어에 그 어떤 하대나 불경의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언어란 그 나라 그 시대 속에 살아있는 것! 적어도 '여인이시여' 혹은 '어머니' 이렇게 옮기며 그 대화를 시작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읽는 것 아닌가? 그런데 '여자여'라고?
문정희 시인의 이 시는 내게 흐뭇한 웃음을 많이 주었다. 우선 촌수에 관한 얘기 부분이었다. 아버지와 나와는 1촌, 오빠와 나와는 2촌이다. 남편과 나는 무촌이니, 사실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이 되지는 않는다. 다른 남자에 관한 것만은 남편에게 말할 수 없다는 대목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라는 구절도. 그렇다고 원수는 아니지요!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요, 물론 그저 웃자고 쓴 말인 것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가 애정을 듬뿍 담아 이 단어를 쓰는 경우도 많잖아요? '어이구, 이 웬수!'
문득 아내의 머릿속으로 훅 하고 들어온 자식들 생각 아니었다면 이 시인의 남편은 오늘 저녁 밥 굶을 뻔 했다! 설마 그랬기야 했을까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라는 대목에서는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무겁다. 착찹하다. 이것이 현실인가? 어떤 의미로 전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든, 배우자이며 반려자이며 평생의 친구이자 동무인 두 남녀가, 그 무서운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 수시로, 예고도 없이, 특별한 사전 작전이나 뚜렷한 명분 혹은 목표도 없이, 대부분 우연성에 의해 그 전쟁의 가운데로 뛰어들게 된다는 그 사실 또한 나는 슬프다.
작전 계획 있는 전투를 하자, 분명하고 납득할 수 있는 명분과 목적을 가지고 싸움에 임하자. 이 전투를 꼭 지금 이런 식으로 치러야 하는 것인지도 냉철하게 따져보자. 손무의 손자병법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피실이격허' - 상대방의 실한 면은 피하고 상대의 약한 곳을 공격하라. 이러라는 말이 아님을 기억하시라! 첫째, 상대방의 강한 곳은 굳이 뻔히 질 것을 알면서 그저 오기로, 화가 나서, 그야말로 이판사판, 이런 감정에 기초한 다툼은 피해보려 애쓰시라는 말이다. 둘째, 마침내 상대방의 약점을 보았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터라면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지체없이 그 약한 곳을 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의 배우자, 반려자, 평생의 친구요 동무다. 그의 헛점과 약한 곳을 노려 친 들, 그래서 이긴다고 한 들, 글쎄 그것이 진짜 이긴 것일까? 승리 후의 노획물은 과연 무엇일까?
삼국지 조조와 관우는 평생 적의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평생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관계에 있었다. 관운장이 먼저 조조의 목숨을 한 번 살려 주었고, 그 뒤 조조는 관우의 죽음을 크게 마음으로 슬퍼하며 그를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 지내 주었다. 나와 남편의 관계는 조조와 관우가 처해 있었던 그런 적의 관계가 아니고, 내가 선택하고 나를 선택한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다. 서로 남의 관계에 있다가 어느새 님의 위치로 내 속에 깊게 들어온 귀한 존재다. 설혹 이러저런 이유와 상황의 변화로 더 이상 '나의 님'이 될 수는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래도 놈으로까지 떨어지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얼른 다시 남으로라도 돌려보내자. 그게 의리다, 그것이 소위 인간으로서의 예의다.
나와 남편의 촌수는 무촌, 그러니까 기실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친족과 인척의 그 복잡한 관계도와 촌수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우연인 듯한 필연에 따라 만나서 하나가 되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림을 일구고 행복을 일구고 일가를 이루는 그런 가히 '천륜'의 세계라는 말이 된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인간의 세계가 신의 세계보다 앞서는, 신들조차 인간 세계에서 나타날 영웅의 존재와 그의 활약을 고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적어도 그 얘기 속에서는 두 세계간의 충돌은 없다. 신이, 신들의 왕 보탄 (Wotan)이 앞장서서 자신들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고 다음 세대인 인간의 세계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리하르트 바그너의 평소 혁명가적인 사상이 그대로 배어있는 스토리 라인이기는 하다.
나는 우리네 일상의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보탄적 사고를 가진 남편과 아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너그러움, 선함, 의로움,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맹자의 측은지심!), 적극적으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사려깊음, 가정을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고 두 사람의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는 전략적 사고의 도입, 충동적인 감정이 늘 나를 지배하도록 방치하지 않는 결연한 자세,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이성적인 사고, 지나온 다리 불태우지 않는 신중함, 적어도 인성에 관한 한 신의 여유와 그 고귀함에 가까이 가려는 태도...
피실이격허, 상대방의 강한 곳은 섣불리 건드리거나 어리석음 속에 공격하지 말자. 운 좋게 상대방의 약한 곳을 찾았다 해도 그저 못 본 척, 적어도 한 두 번은 그냥 넘어가 주자. 상대방이 그것을 모를 것 같은가? 다 안다, 어린아이조차 안다. 은혜 갚은 까치처럼 결국 언젠가는 몇 배의 이자를 더해 그 애초의 원금까지 풍성하게 돌아온다. 거꾸로 언젠가는 내가 상대방의 그 관대함과 모른척해줌을 절실히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저금한다 생각하고, 가끔은 상대방의 어리석음에 그 괘씸함에 너그럽게 눈감아 주시라, 당연 아내도 남편도! 그것이 신의 위엄과 우월성 속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부부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