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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함께 달아난 바다

-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 관찰 가능한 순간들. 아르튀르 랭보 '영원'

by 가을에 내리는 눈

사랑은 영원하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어찌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은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다' 이 정도라면 모를까? 저는 사실 영원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선 개념 그 자체를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걸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프랑스의 괴짜 가출 대왕 미소년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한 모양입니다. 이 시를 처음 만나고 제가 기뻐한 이유입니다. '천재의 작품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함', 중학교 때인가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인 내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에이, 나의 이런 생각, 누군가에게 그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겠어?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엄청 유명한 사람이 저와 비슷한 생각과 말을 한 것을 어딘가에서 읽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됩니다. 이제 상황은 달라지는 것이지요. "야, 내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저 양반도 하고 있었네? 그것 봐, 나도 영 무지렁이는 아니야 이거 왜 이래?" 으쓱 혼자 어깨를 힘껏 올리며, 평소 느껴보지 못한 자긍심과 뿌듯함을 마음껏 느낍니다. 천재의 작품에서 그동안 나조차 우습게 여기고 있었던 대단한 나를 본 것이지요.


여기저기 찾아보았습니다. 영원이란 무엇일까?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 그것은 아예 시간의 개념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만일 그 어떤 것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그렇고 또 이전에도 늘 그랬다, 뭐 이런 개념이었지요.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제게 남았습니다. 그때 이 시를 본 것이지요.


시인은 영원 혹은 불멸을 전통적 개념의 거대하고 도무지 우리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개념으로 보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요, '끝이 없는 양의 시간'의 개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뭔가요? 여러분은 이해가 되세요? 그래서 이 시인은 그 영원성을 정밀하고도 섬세한 우리네 삶 속의 순간들에서 찾아내는 방법을 택합니다. 이 시에서 보면, 태양이 바다 위로 넘어가는, 해가 지는 그 순간, 이것이 자신이 새로 발견하고 인식한 영원성의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글쎄요, 저는 랭보의 이 설명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구체적이고 가시적이고 그래서 명확하잖아요? 그는 또 이 시에서 두 사람 사이의 그저 속삭이는 듯한 대화와 약속에서 영원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았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들에서는 시인은 '인간들의 동의나 승인' 혹은 일상 속의 일시적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한번 더 정리하자면, 아르튀르 랭보는 영원성 혹은 불멸의 개념을 이렇게 다시 발견합니다. 하나, 그에게 기쁨과 환희를 가져다주는, 그 나는 듯이 지나가버리는 순간들 속에서. 왜냐하면 이러한 순간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며 시인이 영원히, 영원성 속에서 즐길 수 있는 다른 형태의 만족감을 그에게 가져다주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그가 자신의 눈으로 그리고 귀로 확인한 실증적 사실이니까요. 둘째, 이러한 순간들이야말로 그를 우리들의 일상 속 무미건조한 지루함과 어리석음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그에게 영원성이란 아주 작은, 관찰 가능한 순간들에서 찾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그 의미 있는 순간들 속에서 영원히!


사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소개할 이 시의 전문은, 영어로 번역된 것을 토대로 제가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서 불어시 원본에서 볼 수 있는 극도로 제한된 단어의 사용, 시의 그 첫 줄과 마지막 줄에서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똑같은 문장 등, 랭보가 마음먹고 야심차게 시도하는 시의 형태적 표현 방법상의 멋진 기법들을 만나볼 수는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불어로 쓰여진 시를 만날 때마다 제가 불어를 못하는 것을 많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불어라는 멋진 언어가 가진 그 표현상의 다양성 그리고 다의적 의미의 내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불어로 된 시를 제가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은 조금 더 힘이 듭니다. 우선 제대로, 마치 또 다른 시처럼 그렇게 멋지게 번역된 영어 버전을 찾아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똑같은 불어시의 영어 번역본 열 가지를 보면 그 열 가지 모두 내용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한 가지 영어 내용을 놓고도 그 한글 번역은 다 다른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래도 보통 그 다름의 정도가 그리 크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불어의 영어 번역본은 그 다름의 정도가 거의 하늘과 땅 차이라 할까요? 여러분 그것 아세요? 외국어 시의 번역의 경우에는 그 번역자의 이름을 마치 그 시를 처음 쓴 사람 대우하듯 그렇게 대접해 준다는 것을?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학창 시절에는 참으로 뛰어난 모범생이었으나 점차 반항적으로 되었고 16세 때 결국 학업을 포기합니다. 이 무렵 쓴 그의 시에는 기독교나 부르주아 도덕 관념에 대한 과격한 혐오의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있지요. 군인이었던 아버지, 그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그릇을 집어던지며 어머니와 자주 심하게 싸웠던 기억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 6살 이후부터 결국은 편모 슬하에서 자랍니다. 카톨릭의 엄격한 규율과 지나칠 정도의 절제를 강요하는 어머니 밑에서 숨막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불과 17세 때 열 살 많은 시인 폴 베를렌을 만나게 되고, 불행하게도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그의 삶을 지배합니다. 걸어서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가고, 또 보름을 걸어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등, 거의 습관적인 가출과 방랑, 방황을 일삼았습니다.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임스 딘의 그 반항기 가득한 하지만 그래서 더욱 멋있었던 얼굴, 그러나 그보다 77년 전에 태어난 아르튀르 랭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반항기와 의도적인 냉소적 자세는 많이 다릅니다. 글쎄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임스 딘의 얼굴에서는 따뜻함을 느끼지만, 랭보의 얼굴에서는 반항과 저항, 심술과 냉소적인 오만함 외에는 별로 찾을 것이 없었어요. 어쩌면 제임스 딘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도 저의 이런 시선에 한몫했을지 모르겠네요. 그의 시력은 물체를 겨우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의 상징과도 같은 그 특유의 곁눈질도 사실은 시각장애 때문에 생긴 버릇이라고 하네요. 참으로 멋진 포르쉐 550을 몰고 가다가 상대방 차량의 중앙선 침범으로 겨우 24세의 나이에 사망한 것 또한 제가 그를 안타깝게 보는 이유의 하나겠지요?


영원에서 순간으로, 추상에서 구상으로, 막연함에서 구체성으로! 그저 막연하고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않는 추상적 개념의 영원에 대한 우리들의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작은 순간들이 바로 그 어려운 영원성의 속성이라고, 그것들이 바로 영원의 한 모습이라는 깨달음을 내게 준 이 시, '아흐쭈어 함부' (Artur Rimbaud - 제가 못하는 불어, 그 멋지고 조금은 요상한 원어 발음을 이리 흉내내어 봅니다!), 그의 시 전문을 소개합니다. 37세에 맞게 된 자신의 죽음의 순간, 그것 또한 그에게는 영원의 한 모습이었을까요?


영원 (Eternity)

- 아르튀르 랭보


그것은 비로소 재발견되었다.

무엇이? 영원성!

그건 바로 태양과 함께 달아난 바다이다.


그저 영원의 감시인으로서의 영혼,

우리는 이제 공허한 밤에 대해

그리고 불같이 열정적인 낮에 대해 속삭이듯 서로에게 고백한다.


이제야 인간의 그 수많은 기도로부터,

진부한 신성들로부터

당신은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는 비로소 훨훨 날아오른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야말로 너로부터도 떨어져 혼자이고,

타다 남은 공단의 옷들,

의무감도 비로소 숨을 돌린다

그 누구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 마침내.


이제 여기에는 굳이 애써 바라는 것도 없고,

긴급한 것 또한 없다.

그저 끈기있는 분별력,

고뇌만이 확실할 뿐.


그것을 이제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무엇을? 영원 혹은 불멸.

그것은 바로 태양과 함께 달아난 바다라는 것을.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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