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방통 인간의 몸

- 무쇠보다 강한 나의 육체, 고마운 내 동무. 조지훈 '병에게'

by 가을에 내리는 눈

이삼일 밤잠을 설치고 평생 거의 경험하지 않은 식은 땀도 흘리고, 그런 아픔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반전의 신호가 감지된다. 기쁨의 소리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저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나의 간구에 대한 너그러운 답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난 밤은 모처럼 제대로된 나의 잠을 잤다. 어제의 뒤늦은 깨달음에 따른 새로운 전략도 오늘 아침 식사를 시작으로 서둘러 시작한다, 큰 희망과 기대 속에. 내가 승기를 잡은 것이면 좋겠다.


그 고장 없고 오래 간다는 독일의 밀레 세탁기, 밀레 청소기도 그래봐야 10년 혹은 15년이다. 얼마 전 러시아 인접 나라에 한동안 머무를 때 유난히 이 두 제품이 생각났다. 내 일상 속 그 존재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런데 우리네 몸은 50년 60년은 끄덕도 없다. 물론 통상은 특별히 부품의 교체도 없다. 그냥 애초의 그것을 그대로 쓴다. 그로부터 더 나이가 들어도 살짝 손을 보고, 그러고는 또 문제없이 그렇게 쓴다. 무쇠는 녹이 슬지만 우리의 몸은 녹도 슬지 않는다. 무적도 이런 무적이 없다.


나는 역사 속 모사 (책략가) 중에 장자방 (장량)을 좋아한다. 제갈량보다는 나는 장량이 좋다. 그는 말년도 좋았다. 유방이 마침내 천하를 손에 넣은 후, 그때 그는 앞을 내다보는 책사답게 주군 유방이 내리는 상을 정중히 사양하고 그냥 산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렇게 자신만의 천수를 확보한다. 반면에 한신을 비롯한 함께 활약했던 다른 동료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갑자기 얘기가 왜 이리로 흐르냐구요? 네, 방통 얘기를 하려구요.


새끼 봉황이라는 뜻의 '봉추'로도 불린 방통, 하지만 어이없는 죽음을 맞지요. 제갈량과 함께 유비를 위해 활약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급적 주군 유비의 뜻을 많이 고려하려고 했던 제갈량과는 달랐습니다. 방통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함으로써 주군 유비를 제지할 수 있는 그런 강직함과 올곧은 성정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신통방통, 널리 통달했다는 의미와 함께 '매우 대견하고 그래서 크게 칭찬해 줄 만하다' 그런 뜻으로 쓰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후자의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의사인 친구 녀석이 자주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 몸 그리 약하지 않아. 한번 믿어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결국은 이겨내거든. 물론 약의 도움이 있으면 더 좋겠지.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럼 옛날에 약 없을 때는 그냥 다 죽었나? 아니잖아? 우리가 약이라는 간편물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지. 우리 몸에게 도무지 기회라는 것을 안 주잖아? 그렇게 우리 몸은 점차로 약해지는 거야. 믿음이 없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의 그 무한한 힘과 능력에 대해, 그 잠재력에 대해. 그게 문제야!'


제가 약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제가 머무르고 있던 나라에서는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그런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의사와 진단 시스템, 약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힘들었지요. 그러니 가끔, 아주 가끔 고장이 나면 그저 자연 면역 혹은 자기 회복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지요. 제 몸은 그때마다 저의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어요. 참 고마운 일이지요.


사탕발림의 소리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느껴서, 그리고 때로는 격려와 응원의 뜻으로 잘한다고 칭찬하고 믿음을 주는 행위, 우리 사는 세상에서 꼭 필요하지요. 그렇게 본다면 정작 약하고 쉽게 흔들리는 것은 우리의 정신인 것 같아요. 사소한 일에도 풀이 죽고 금새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하고,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그렇게 넋이 나간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고.


'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 그러니 이 둘은 서로 늘 함께 가는 동무여야 할 것 같아요. 함께 나이 들어 가는 노부부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든든한 보호자요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인 것처럼요. 하나 보다는 둘이 당연 든든하고 실제로도 큰 힘이 되잖아요?


저의 어리석은 잠깐의 방심과 망각이 가져온 육체적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한 정신적인 흔들림이, 그래도 고마운 제 몸의 '홀로 이겨냄'으로 회복의 기미가 보이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오늘 주저리주저리 이 글을 씁니다. 우리의 몸을, 그 강인함을 크게 칭찬하는 의미로 말이지요.


이제 오늘의 시를 봅니다.


조지훈 시인의 '병에게'라는 이 시는 역설적으로 지금의 이 글에 딱 어울립니다. 저와 이 시와의 만남 또한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요?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그. 이번 제 경우와 똑같습니다. 잊고 방심하니 이때다 싶어 오는 것이지요. 아니면 그동안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서 그저 백신처럼 가볍게 그리 오려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구요. 그런데 시인은 그런 불청객을 내치고 싫은 표정을 하기 보다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을 탓하네요. 뉘우치네요.


늘 내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는 자네, 그 병이라는 이름의 존재. 나는 자네의 낮은 목소리에 늘 귀기울인다네, 그거 아나 자네? 내가 마음에 없는 소리로 '나는 죽는 것 따위 그리 두렵지 않아' 하고 떠들어대면 자네는 크게 화를 냈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라고. 자네는 나의 벗이라네. 실은 내가 공경한다네 자네를, 자네의 그 큰 존재감을.


하긴 자네 성미가 좀 특이하기는 하지. 내가 간혹 자네의 깊은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버럭 성을 내기라도 하면 자네는 몇 달이고 나를 설득하지, 그렇게 오래 내 옆에 머물러 있지. 뒤늦게 내가 자네의 그 뜻을 알아채고 자네에게 기대고 의지하면 그제서야 자네는 나를 떠나가지. 아무런 미련도 없이, 나를 뿌리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자네는 그런 식으로라도 자네가 굳이 또 다시 내게 온 뜻을 내가 알아채기를 바라는 것이지. 더 큰 일을 막아주기 위한 사전적 예방책, 백신으로서의 자네의 그 고마운 역할을. 이번에도 그런 것이지? 바로 그 뜻이었지? 그래서 내게 서둘러 온 것이었지? 그리고 이제 떠나는 것이지?


고맙네 내 친구, 내가 또 어리석음과 망각 속에 있다 싶으면 언제고 다시 와주게나. 그때는 우리 둘이 차라도 한 잔 마시세. 그리고 예전처럼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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