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만만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태어나기를 우울이 디폴트로 깔려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선천적인 기질쯤으로 여겼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우울증을 평생 데리고 살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가짐은 맞다. 하지만 그 와중에 조금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받고 이런저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라는 자세는 틀렸다.
우울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지는 오래인데 '우울증 환자'라는 정의는 끝내 내리지 못했다. 마음 한 구석에 '약 먹기 시작하면 끝장이야.'라는 생각이 있었다. 약을 먹고 문이 열릴 수도 있는데 왜 문이 닫힐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아무튼 그래서 이번 주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문이 더 굳게 닫힐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새로운 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건데, 나는 우울증을 주제로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나 우울증이야'라고 하면 나부터도 자세를 바로하고 진지해질 테지만 그냥 별 거 아닌 것처럼, 우울증을 어느 정도 만만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싸우든 달래든, 데리고 살만한 기운을 차리고 싶었다.
나 같은 사람들, 이 진심이지만 유쾌한 우울증 가이드북을 읽어보면 좋겠다.
P. 9
많은 병이 그렇듯 우울감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좋아지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병이 그렇듯 증세가 심해지기도 한다. 우울증 대륙은 어떤 경우, 가만히 두면 그 면적이 넓어진다. 언덕이 높아지고 개수가 늘어난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을 들여다보았더니 언덕이 너무 많고, 오를 생각을 하니 아득해져서 헤쳐 나갈 의지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내 인생은 이런 식이니까. 그렇게 점점 나빠진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P. 98
환자가 약물치료보다는 더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를 염려할 때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약물치료는 현재의 고통 자체를 줄여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또한 스스로에 대해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준다고요. 우리는 일단 어느 정도 괜찮은 상태가 되어야 자기 자신에 대한 의미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P. 147
환자는 자기 상태를 잘 알아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그런 흐름 속에서 조금씩 더 편해지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 내가 너무 무리하거나 상대방을 무리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딘가에 나쁜 에너지가 고이지 않기 위해서, 소중한 사람을 당황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당신의 어려운 고백을 의외로 세상은 가볍게 받아줄 수도 있다. 가장 무겁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우리 환자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