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절대로 자신이 원하는 성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미 죽었지만 이야기를 내내 장악하고 있는 레베카와 주인공이지만 끝내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나'의 극명한 대비는 독자마저 레베카의 존재감에 압도당하게 만든다.
번번이 지레 겁먹고 움츠러드는 '나'의 모습은 답답하지만, 독자인 내게 그런 모습이 없었다면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는 걸 깨닫고는 뜨끔했다. 댄버스부인이 정한 메뉴를 바꾸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시하는 장면은 너무 통쾌해서 '나'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얼른 나이가 들어서 경험 많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나'에게 공감하면서도 이미 맥심만큼 나이를 먹은 내가 아직 같은 생각인 걸 보면, 인간은 사는 동안 절대로 자신이 원하는 성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대 초반인 '나'가 겪은 고난은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고, 결혼생활의 위기를 초래하지만 결국 지나갔다. 그리고 그만큼의 경험치를 쌓은, 조금은 어른이 된 '나'로 변화시켰다.
P. 11
나는 고통을 겪은 인간이 더 강하고 좋아진다고, 그리하여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불의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바로 그 불의 시련을 최대한 겪어낸 셈이었다. 우리는 공포와 고독, 그리고 대단히 큰 좌절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고난의 순간을 맞게 된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마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승리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믿고 있다.
P. 28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너무 어렸다. 그것이 문제였다. 좀 더 나이가 있었다면 손님과 눈길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부인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무언의 위로와 공감을 표시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수치심에 사로잡혀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P. 107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내 모습이 보인다. 원피스 차림에 땀 밴 손으로 장갑을 꼭 쥐고 문간을 넘어서는 왜소하고 어색한 모습. 돌로 장식된 거대한 홀, 서재로 통하는 넓은 문, 벽에 걸린 명화들, 2층 발코니로 이어지는 멋진 계단, 그리고 홀을 메우다 못해 뒤쪽 복도와 식당에까지 늘어선 얼굴, 얼굴들. 겹겹이 늘어선 그 얼굴들은 입을 벌리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처형대로 끌려온 죄수를 보는 듯했다. 그들 가운데
P. 136
나 이전에 이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나처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었으리라. 내선 전화를 들어 그날의 지시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고는 메뉴 종이 위로 펜을 사각거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수정했겠지.
P. 190
마침내 그 이름을 내 입으로 말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어떤 일이 이어질지 기다린다. 그 이름을 말해버린 것이다. 레베카라는 단어를 큰 소리로 발음한 것이다. 안도감이 들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서 풀려난 듯 시원했다. 레베카. 드디어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