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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방식

삶은 종종 일상을 빼앗는다. 지루한 쳇바퀴이자, 우리가 딛고 선 땅을.

by 오공부

아침에 일어나서 별 어려움 없이 출근 준비 하고, 오늘 점심 메뉴는 뭘지 살짝 기대하다가 곧 가볍게 기뻐하거나 실망하고, 조금은 긴장한 채로 사무실에서 일을 처리하고, 짬짬이 웃을 일도 짜증 날 일도 겪고, 노곤한 몸과 정신으로 퇴근해서 아이들과 반갑게 상봉하고,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불 끄기 직전까지 실랑이를 벌이다가 드디어 잠들기까지의 평범한 하루.



이런 평범한 일상을 누리면서 '난 참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눈물겹게 고마워하게 된다. 별일 없는 일상을 누린 것에 대해.



아무리 평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일 년에 두세 번 쯤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의 스트레스 상황을 겪게 된다. 건강 문제, 금전 문제, 인간관계 문제, 불의의 사고 등등. 수많은 리스크를 안고 살지만 평소의 우리는 안온한 일상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거라 믿는다. 심지어 별일 없는 일상을 '쳇바퀴' 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그래서 삶은 종종 우리에게서 일상을 빼앗는다. 지루한 쳇바퀴이자, 우리가 딛고 선 작지만 단단한 땅을. 그리고 잃고 나면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적당한 수면을 취할 수 없고, 음식을 삼킬 수 없고, 양치질이나 샤워하는 일조차 힘에 부치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님을. 일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겨울을 나던 어느 날 '환기를 시켜야겠다'라고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던 장면을 지금도 기억한다. 드디어 일상을 되찾을 수 있겠다는 실감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먹고 자는 것도 힘겨웠던 내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기까지 너무 많은 눈물과 불면이 있었다.



나는 먼슬리 플래너를 꾸준히 사용 중인데 그 시기를 떠올리려고 하면 플래너의 네모칸이 그저 새까맣게 칠해진 이미지만 떠오른다. 그야말로 깜깜한 어둠, 인생의 흑역사, 빛이 없는 터널을 통과하던 시기였다.



일상을 서서히 되찾는 동안 나는 육아의 즐거움을 새롭게 발견했고, 내게 소속감을 준 회사에 감사했고,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자연에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가볍게 주고받는 농담이 그 어떤 보약보다 나를 생기 있게 했다. 평범한 일상이 놀라운 선물꾸러미로 느껴졌고, 나야말로 진정한 행운아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몇 개의 터널을 더 통과했고, 그때마다 좌절했지만 일상을 되찾을 때의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최근에도 짧은 터널 하나를 지났는데,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매일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괴로워했다. 어제는 특히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고, 이제는 어떻게든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자니 너무 무서웠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한숨이 나왔고, 진심으로 웃는 것이 힘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이 났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무서워서 미뤄왔던 어떤 행동을 오늘 오전 중에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이부자리를 박차고 수영을 하러 갔다. 물론 평소보다 30분이나 지각을 해서 실제 수영은 20분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친정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평소처럼 아이들 준비를 시키고 출근을 해서 다시 그 일을 떠올렸다. 긴장이 됐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근한 지 한 시간쯤 뒤에 나는 그 일을 실행했고, 상상처럼 무섭거나 엄청난 스트레스는 없었으며 실행 후엔 놀라울 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2주 동안 왜 그렇게 속을 끓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만큼 싱겁게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는 신바람 나게 집 나간 일상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중이다. 내가 아주 조금 더 유능하게 느껴지고, 회사일도 조금은 더 흥미 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확실하다. 기분이 해내는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 탓이 아니라 기분덕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리라. 그래서 이런 기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일상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작지만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행운아들에게 이 글이 닿기를.


밖에서 돗자리 깔고 앉아 컵라면 먹는 일상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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