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으로 가득 찬 그 숲의 이름은 고통이다.
부모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 또는 그다음으로 고통스러운 일을 꿈에서 보았다. 나는 애간장이 다 끊어져 녹아내리는 신체적인 고통을 생생히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냉정하려고,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강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냥 삶을 끝내고도 싶었다. 그러다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나 안도해야 하는데, 나는 그저 두려웠다. 악몽이 현실이 될까 봐. 삶이 기어이 그런 일을 겪게 할까 봐. 나는 절대 겪고 싶지 않아서 또다시 삶을 끝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나의 두려움의 근원인가? 나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걸까? 그런 일을 통해서 내가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고 믿고 있나?
꿈의 자세한 내용을 기억하고 기록하면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적지도 못하겠다. 부모가 된다는 건 한없이 약해지는 건가? 나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두려움에게 먹이로 주는 일인가? 그럼에도 기꺼이 그렇게 하는 용기인가? 삶은 내가 더 용감해지길 바라는 걸까?
용감해지기 위해 반드시 이 길 밖에는 없는 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의 나는 이 삶 이전에 스스로에게 이런 경험을 허락한 것일까? 나는 현생이라는 환상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부모가 되기를 선택하고 자식을 낳은 그 순간, 내 앞에 무슨 길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나? 그 기대와 현실은 얼마나 다른가? 앞으로 또 얼마나 달라질까? 나는 또 얼마나 약해질까? 나의 약함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까!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을 나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분노 대신 깨달을 수 있을까? 삶을 스스로 끝내는 대신 고요히 수용할 수 있을까? 삶을 끝내지도 수용하지도 못한 채 분노와 체념의 사이를 오가는 삶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삶은 정말 고통이구나. 나는 삶이 던져주는 고통에 대비할 수 있나?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이렇게 냉소주의에 빠져버리는 걸까? 나는 스스로 긍정적인 편이며, 그렇게 살고자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뼛속 깊이 허무에 빠져있는 존재인 걸까?
나는 이 꿈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지워버리고 싶은 걸까. 그것도 확실하지가 않아서 괴롭다. 이것을 많이 생각해서 어떤 형태로든 내 삶에 작용할 거라고 생각하면 두렵다. 그렇지만 무시하고 회피하고 지워버리는 게 나에게 이로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혼란스럽다. 이 와중에 추위를 느끼고 졸음은 다시 밀려온다. 삶에 떠밀려가는 느낌, 나의 의지보다 더 높고 강력한 무언가에 지배를 받는 기분이다. 만일 그런 힘이 있다면 나는 그 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해야 할 일조차 하지 않고 그냥 무기력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잠들기 전 읽은 책에서는 '생각과 질문이 과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쯤에서 멈춰야 하는 걸까.
부모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얻고 싶은 욕심과, 부모라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심을 본다. 두 가지 욕심이 끝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내 마음을 본다. 둘 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야 하는 운명을 알면서도 거스르고 싶어 하는 나를 본다. 욕심으로 가득 찬 그 숲의 이름은 고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