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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형벌이 아니기에(아무튼 데모, 정보라)

국민 전체가 그런 삶에 빠질 뻔한 경험을 하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by 오공부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이 조금 재미있다.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가 두꺼운 책들 사이에 귀엽게 끼어있는 '아무튼'시리즈를 발견했는데, 나는 이 책이 《아무튼 메모》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집어든 책이 '메모'가 아니라 '데모'인 것을 확인하고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오히려 좋아!'를 외치며 빌려온 것이다.



집회에 참석해서 구호를 외치고 함께 행진하는, 데모는 누가, 왜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내린 내 나름의 결론은 '삶이 형벌 같이 느껴지는 이들이, 삶을 삶답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개선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



국민 전체가 그런 삶에 빠질 뻔한 경험을 하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무튼 데모, 정보라, 위고, 2024
아무튼 데모, 정보라, 위고, 2024

P. 15

나는 이태원에 가본 적이 별로 없다. 트랜스젠더 추모 행진이 내가 가진 얄팍한 이태원의 추억이다. 나는 이태원이 계속 그런 장소이기를 원했다. 누구나 웃고 울고 소리치고 춤추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기를.



P. 36

청소년 따님과 함께 찾아온 어느 아버지가 나에게 세월호 특별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국회 간담회에 갔을 때 들은 내용을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고 다른 참사 유가족들도 연대하고 있다고 알렸다. "예를 들면 씨랜드 참사에서 쌍둥이 딸을 잃으신 아버님이..."까지 말했을 때 얘기를 듣고 있던 남자분이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당장 볼펜을 집어 들고 서명했다. 그리고 따님도 서명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마음들이 모여서 그렇게 서명지를 한 칸씩 채워나갔다.



P. 47

"서울 거리에 턱을 없애주시오"라고 외친 김순석 열사에 대해서도 전장연 집회에서 처음 배웠다. 바퀴 달린 가방을 끌며 보도에서 턱이 없는 곳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나는 턱 없는 거리를 위해 누군가 목숨을 바쳤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P. 69

'남자'와 '여자'가 혼인해서 2.1명 혹은 1.8명의 비장애인 아이만 낳아 키우고 노후에는 자식과 손자들, 즉 사회제도의 지원 없는 가족 안의 (주로 여성의 무급 노동에 의지한) 돌봄으로 노년의 돌봄 수요를 해결하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에 손해를 끼치지 않을 만한 연령대에 적당히 사망해주기를 기대하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다양한 삶이 이미 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지금,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동성혼 법제화는 현실적인 요구이다. 다시 말하지만, 삶은 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P. 129

내가 데모하러 다니지 않았다면 세월호 농성장에서 동조 단식 천막 앞에 서 있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배너도 못 보았을 것이고, 나에게도 노조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며, 대학강사가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서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불안정한 직종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교수가 되겠지 하고 지금도 꾸역꾸역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가 해고 상태인지 고용된 상태인지, 해고당했다면 언제 해고당했는지 본인도 모르는 직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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