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하 Dec 12. 2018

나의 생일날, 나는 남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서른살까지의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2018년 11월 15일은 저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남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일단 저는 생일을 왁자지껄하게 보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칭찬과 선물에 익숙하지 않아서, 감사하게도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이 케익이나 선물을 보내주신다면 몸둘바를 몰라합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이랄까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제 생일엔 엄마를 챙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예쁜(?)딸을 낳은 건 엄마가 축하 받을 일이야'라면서요. 그렇게 (회사가 준) 50만원짜리 신세계 상품권을 드리면 그 때의 제 나이처럼 좋아하셨어요.


 그러다 올해는 '뭔가 서른은 특별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란스러운 생일날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념은 하고싶다!'인거죠. (그 차이 미묘하다) 그래서 뭐라도 해볼까? 하다 컴퓨터를 뒤적거렸습니다. 평소에 이런거 저런거 하고싶은 성격이라 당장 모아놓거나 써놓은 문서들이 많아서.. 그러다 한 폴더를 발견하게 됩니다.


 언젠가 모아 책을 낼거라던 <나를 움직인 문장들>이라는 폴더였어요. 만화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들은 저를 움직였던 문장을 모아둔 것들이었어요. 캡쳐는 800장이 넘어가고, 카피도 8천개 정도 모아놨군요. 아마 스무살 초반부터 모으기 시작했으니, 20대의 오하림의 반은 이것으로 만들어졌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내 주변에 있는 좋은 친구들이구나- 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 답은 간단히 나왔습니다. 서른의 오하림을 만든 건 누구였나. 이 문장들과 주변 사람들이구나. 별건 아니지만 이것들을 엮어서 감사한 마음과 함께 보내드려야겠다-로 이 프로젝트는 시작합니다.





<나를 움직인 문장들> 프로젝트 시작.






우선 서문을 씁니다. 구구절절 당신은 소중하다 뭐 그런 내용을 부끄러워서 길게 쓴겁니다.












저를 움직인 문장들은 예를 들면 이런건데요,



“나올래?”

동네 친구가 있는 건 좋아요. 오래된 동네 친구요. 어쩌다 술 생각이 나면 쉽게 불러내고 밤공기가 상쾌한 날엔 산책할 수도 있죠.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가도 우연히 만나면 더욱 반갑고요. 그중 한 사람과는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회사와 거리가 좀 되어도 나쁘지 않고요, 월세가 좀 더 나가도 말끔한 공간이라면 좋겠고요. 근처엔 아담한 공원이 있어 산책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필요할 때 급히 샀던 물건들 대신 정성껏 고른 소품들이 놓이면 좋겠고요, 혼자니까 대충이 아니라, 혼자니까 더 아늑해야죠. 더 나은 풍경과 더 새로운 일상과 더 많은 시작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곳에도, 편한 동네 친구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 오구실 시즌2 - 1화




통조림이 발명된 건 1810년 이라는 구나
그런데 깡통 따개가 발명된 건 1858년, 이상하지?
중요한 게 나중에 늦게 오는 경우도 있단다.
애정이라는 것도, 생활이라는 것도

-최고의 이혼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 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거야.

- 리틀포레스트/겨울




진구야. 산다는 건 그리 나쁜 게 아니야.
때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뒤떨어진다고 여겨 풀 죽을 때도 있겠지. 돈은 있는 편이 좋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건 멋진 일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삶에 우열이나 승패 같은 건 없으니까.

좋은 인생, 그러니까 살아가는 멋짐이란 뭘까?
작은 일에도 있는 힘껏 노력해서 그때그때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행동 속에 힌트가 있다고 난 생각해.
 
넌 이제부터 몇 번이고 좌절할 거야. 때로는 이젠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할 괴로운 때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넌 일어설 거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이야! 넌 주저앉더라도 일어설 수 있는 강함을 가지고 있어. 이전보다 좀 더 강해지려는 힘을! 그리고 강해져서 계속 살아가는 거야. 알았지?

- 도라에몽 EP. 45년 후의 내가 왔다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도, 명대사라고 할 것 까지도 없는 문장들이죠. 그런데 그래서인지, 평범해서인지,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서 인지 저에게 크게 와닿았던 문장들이에요. 개인적인 취향이 남에게 얼마나 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받았던 감동까지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고른 문장들입니다. :)








있는 문장을 엮는 건 금방 하는 일이라,

원고를 다 끝내놓고 종이를 고르러 충무로에 갑니다.


처음 종이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왠지 감성에 젖어 버스를 탔습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종이가 있네요.

몇 가지 샘플을 사와 종이의 감촉과, 책이 되었을 때의 시뮬레이션(그저 상상) 등을 해봅니다.





사이즈는 작은 가방에도 들어가는 게 좋다는 친구의 의견을 반영합니다
인쇄 테스트를 위해 방문했던 인쇄소


그리고 책의 사이즈와 두께 등을 계산해 샘플북을 만들어보죠. (독립출판 하시는 분들께 절을 올립니다. 대단하세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편지도 함께.






포장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알아차린 사람은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향까지 뿌렸습니다. (이런 디테일)








그렇게 이 프로젝트는 완성이 됩니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생일 전 약 2주 내내 종이와 싸우고 인쇄소와 싸우고 택배와 싸우고.. 정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간에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처음 가졌던 생각을 되짚으며 다시 정신을 차리곤 했었죠. 그리하여 저의 생일인 11월 15일에 받을 수 있도록 택배를 보냅니다.


  그리고 당일, 저의 문장을 받은 친구들은 감동을 해주며 길고 긴 축하 메시지를 저에게 보내줬고, 어떤 이는 자신의 소중한 문장들을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그 어떤 생일보다 더 많은 축하와 선물과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처음입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무언갈 끝내본다는게요. 저는 끈기가 없어서 뭘 해도 끝을 못 보고 싫증을 내는 타입이라 이렇게 뭔가를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하고 만들고 끝내는 과정 자체가 좋았습니다. 결과도 좋았고요. 주는 기쁨이 이렇게 큰지도 처음 알았고요.









책을 받은 친구들은 예쁜 사진까지 보내줬네요.  







저는 2018년 11월 15일을 절대 잊지 못할거예요.

<나를 움직인 문장들>은 10년 뒤 40번째 생일날 2쇄를 찍을 예정입니다.




제 인생에 참여해주신

모두에게, 감사를.



















작가의 이전글 매번 좋은 점만 보려는 것도 지친다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