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젬(El Jem)

원형경기장과 캣콜링

by 오행

마트마타에서 차로 3시간 넘게 달려 엘젬에 가야 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구글맵은 200km 넘게 직진만 하라고 안내해 줬다. 쭉 뻗은 길을 달리며 다양한 광경을 마주했다. 도로 위에 놓여 있는 교량이 만들어낸 그늘 밑에는 요깃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속도위반을 단속하는 경찰들도 항상 교량 밑에 있었다. 햇살이 너무 뜨겁다 보니 그늘에서 대기하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마주쳤고, 이미 막 건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보았다. 안전한 교량을 통해 길을 건너는 당나귀와 농부도 보았다. 평범한 도로에서도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이 색달랐다.

건물 사이에서 보이는 엘젬 원형경기장

엘젬에 거의 다 왔을 땐 기름이 아슬아슬하게 남아서 에어컨도 끄고 달렸다. 창문을 열면 바람의 저항 때문에 연비가 떨어질까 봐 창문도 열지 않았다. (실제로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엘젬으로 나가는 나들목 쪽에 있는 주유소를 검색하고 급하게 경유지로 설정했다. 제발 여기까지만 잘 도착해 달라는 마음으로 차를 응원했다. 우리의 응원이 잘 닿았던 걸까, 다행히 주유소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십년감수한 경험이었다. 튀니지를 여행 중이라면 기름은 항상 여유 있게 채워 두시길!

엘젬 원형경기장

엘젬은 원형경기장으로 유명한 도시다. 이 원형경기장은 지금의 튀니지 일대가 로마제국의 아프리카 속주로 편입되던 서기 238년경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도 이 유적지를 보기 위해 엘젬에 잠시 방문한 것이었다. 목적지로 찍어둔 공용 주차장에 다다를수록 원형경기장이 눈에 훤히 보였다.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훨씬 웅장하고 외형도 잘 유지되어 있었다.

엘젬 원형경기장

주차를 마친 뒤 매표소로 향했다. 가는 길가에 있던 상인들이 중국어와 일본어로 인사를 건넨다. 도시에 다시 돌아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튀니지 남부에서는 자주 듣지 못했던 인사말이었다. 남부에서는 마주친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지도.

경기장 안에 들어서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곳을 잘 간직해 준 튀니지에게 고마웠다. 내부는 로마의 콜로세움보단 단순했지만 그래서 구경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계단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었고 경기장 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었다.

엘젬 원형경기장

원형경기장 안과 밖을 구석구석 구경했다. 건축물이 세워져 있던 흔적이 보였고 벽돌엔 묵은때가 껴 있었다. 벽에 진 얼룩을 보고 있으니 엘점 원형경기장이 지나온 세월이 느껴졌다.

엘젬의 전망을 보러 경기장 안에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이때 튀니지에서 겪었던 기분 나빴던 일 중 하나가 일어났다. 뒤에서 걸어오던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글쎄 이 아줌마를 보고 휘파람을 불며 캣콜링을 했던 것. 처음엔 나에게 그러는 줄 몰랐다. 옆에 짝꿍도 있었고 난 평범한 옷차림에 모자도 눌러쓰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들어 보니 나에게 부는 휘파람이 맞았다. 어이가 없어서 뒤를 돌아봤다. (내가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으면 너희 같은 자식이 있을 나이란다.) 한 아이가 성급히 덩치 큰 아이 뒤로 숨었다. 덩치 큰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 아이를 가리키며 '얘가 그랬어요.' 같은 신호를 보냈다. 그 아이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말없이 노려봤다. 그때만큼은 아이들이라고 너그럽게 봐줄 생각은 없었다. 아이들은 성급히 도망쳤다. 옆에 짝꿍이 같이 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따질 필요도 없이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못된 일인 줄 알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튀니지에서 당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캣콜링이었다.

엘젬 원형경기장에서 바라본 엘젬 전경

불쾌한 감정은 마음 저편에 꼭꼭 숨겨두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탁 트인 전망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멀리서 바라본 엘젬은 적당히 번잡하면서도 조용한 도시였다. 시내를 조금 둘러볼까 했지만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수스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엘젬 원형경기장 근처 가게에서 아이스크림만 사 먹었다.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았던 망고 아이스크림 가격은 한국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맛은 한국 것보다 좋았고 양도 많았으므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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