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의 도시
부제가 조금 자극적이지만 사실이다. 수스에서 겪은 인종차별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이었다. 어쩌다 보니 엘젬 편에서부터 튀니지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쓰고 있는데 이는 엘젬에서부터 안 좋은 경험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튀니지라는 나라 전체를 비난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며, 튀니지 여행을 계획한 분들이 어느 정도 대비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쓰는 내용이다. 나는 이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방문했던 터라 많이 당황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쁜 일을 겪으면서까지 튀니지에 갈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의견을 매우 존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땅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매우 가치 있었기 때문에 감히 튀니지에 한 번쯤은 가 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 둔 채 말이다.
수스 1일차
엘젬에서 약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수스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어설 때부터 경비가 삼엄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경비원이 직접 트렁크에 금속탐지기를 감지한 후 차단기를 열어 줬다. 삼엄한 경비는 2015년 수스 해변에서 일어난 총격 테러 때문에 확충된 게 아닐까 싶었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쳐서 그런지 해변가 바로 앞에 있는 일부 호텔은 운영이 안 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멋진 경치가 펼쳐졌다. 발코니로 나가니 왼쪽에선 수스에서 유명한 Bou Jaafar Beach(부자파르 해변)가 보였고, 오른쪽에선 수스 시내가 훤히 보였다. 수스가 유명한 휴양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근사했다. 미국의 마이애미 해변과 스페인의 바르셀로네타를 합쳐 놓은 듯했다. 거기에 튀니지만의 상아색 건물들이 합쳐진 경치를 보고 있으니 수스가 왜 휴양지로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숙소에서 조금 쉬다가 오후 네 시 반쯤 수스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 부자파르 해변 옆에 마련된 도보를 따라 걸어가는데, 도보와 해변 사이에 길게 연결된 낮은 담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앉아 있었다. 나와 짝꿍이 걸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몇몇은 우리를 보고 니하오와 곤니치와를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 녀석은 내 면전에 대고 곤니치와라고 외쳤는데, 조롱이 섞여 있었다. "You're a racist!"라고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과도 없이 그저 "No, it was just a joke."라고 답할 뿐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해변을 걷는 30분 동안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나자 경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머리가 얼떨떨해졌다. 튀니지에 대한 좋은 감정들이 다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해변을 빠져나와 수스 메디나 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 길에선 별다른 일이 없었다. 다만 누군가 다가오기만 해도 바짝 긴장을 하게 됐다. 30분 만에 생겨버린 피해의식이라니. 허허.
조금 걷다 보니 다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고, 주변 경치도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도시는 도시였다. 차와 사람이 정말 많았다. 메디나로 가기 위해선 길을 건넜어야 했는데, 신호등이 없는 큰 대로에서 차가 없는 타이밍을 맞춰 건너야 했다. 다행히 사람이 횡단보도에 있을 땐 운전자가 잘 멈춰 주었다.
수스 메디나에 도착하자 최악의 튀니지인을 만났다. 그 자식은 멀리서부터 "니하오! 니하오!"를 끊임없이 외치며 성큼성큼 우리 앞을 지나쳤다. 구글맵에 집중하고 있던 짝꿍은 이를 보지 못했고, 나 혼자 그건 인종차별이니 하지 말라고 외쳤다. 내 말을 들으며 지나친 그 자식은 '닝냥뇽'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나를 더 조롱하며 친구들 무리로 걸어갔다.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걸 감지한 짝꿍은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 자식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퍼부으며 화를 삭였다.
우리는 구글 평점이 높은 튀니지식 샌드위치를 파는 곳에 찾아갔다. 유쾌했던 가게 주인분은 아랍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 가며 우리에게 메뉴를 설명했다. 고기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촉촉한 식감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양도 많아서 샌드위치 하나만 먹었는데도 배가 빵빵하게 불렀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토죄르에서 구한 마공 와인을 열었다. 마공 와인은 명성대로 맛있었다. 입에서 부드럽게 맴도는 와인을 홀짝이며 이날 있었던 안 좋은 일은 털어버렸다. 기억에서 지워지진 않겠지만 남은 여행 동안 화가 났던 감정을 끌어내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스 2일차
수스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걷어 부자파르 해변을 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날씨도 쾌청해서 더워지기 전에 수스 대모스크와 수스 리바트에 가 보기로 했다. 조식을 든든히 먹고 마음의 준비를 한 채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제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데 사람이 거의 없다. 같은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골목길을 봐도 한적했다. 이상하다 싶어 생각 해 보니 전날이 일요일이었다. 여행 중엔 요일을 신경 쓰지 않는 나와 짝꿍의 버릇 때문에 이를 놓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는 목요일과 금요일 또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휴일로 지정하는데, 튀니지는 토요일와 일요일이 휴일이다. 유럽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야 어제 보았던 수많은 인파와 그 속에서 겪었던 인종차별이 이해됐다. 유난히 사람이 많았던 만큼 예의 없는 XX들도 여럿 섞여 있던 것이다.
한적한 수스를 걸으며 마주친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대뜸 남의 나라 말로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이제야 제대로 수스를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벼워진 발걸음과 함께 수스 대모스크로 향했다. 입장하게 전 머리에 얇은 재킷을 둘렀다. 카이로우안 이후 두 번째로 방문하는 튀니지의 모스크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는 게 없으니 카이로우안에서 봤던 모스크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비무슬림에겐 옅은 황톳빛의 벽돌로 지어진 기도 공간으로 보일 뿐이었다.
서기 851년에 지어진 수스 대모스크는 여러 세월을 거쳐 확장과 복원이 이뤄졌다. 1988년 수스 메디나 구역이 유네스코로 지정되며 대모스크 역시 이에 포함되었다.
모스크 구경을 마친 뒤 바로 옆에 있는 Ribat of Sousse(수스 리바트)에 들어갔다. 수스 리바트는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다. 요새 안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탑으로 올라갔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 도착한 탑 꼭대기에선 수스가 사방으로 잘 보였다. 바로 옆에 있는 대모스크를 항공뷰로 즐길 수도 있었다. 반대편으론 수스 시내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경치가 좋아서 꽤 오랜 시간을 요새 꼭대기에서 머물렀다. 유난히 푸르렀던 하늘과 상아색 도시 풍경이 정말 잘 어울렸다. 튀니지 사람들이 건물을 상앗빛으로 짓는 건 푸른 하늘과 잘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유적지 구경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더위를 식힌 뒤 튀니지 여행 전부터 기대하던 해수욕을 즐기러 나갔다.
투숙객들만 즐길 수 있는 호텔 바로 앞 해변엔 짚으로 엮은 귀여운 파라솔이 설치돼 있었다. 자리를 잡은 뒤 지중해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스노클링용 수경을 착용했다. 바다를 유영하며 물고기도 종종 마주쳤다. 다만 파도가 생각보다 세서 멀미가 나는 바람에 오랫동안 바다를 들여다볼 순 없었다. 물놀이를 마치고 선베드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수영을 즐기지 않는 짝꿍은 이미 낮잠에 빠질 기세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시내를 조금 산책하고 저녁까지 먹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 해변 쪽 시내로 향했다. 이 부근은 메디나 근방과는 다르게 신시가지 느낌이었다. 해가 졌지만 위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게 앞 테라스에서 저녁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곤했던 우리는 구글 평점을 보고 찾아간 식당에서 또 Ojja를 시켰다. 친절한 미소로 카운터에 있던 가게 주인은 내가 어설프게 배운 프랑스어로 더듬더듬 말하자 유창한 영어로 응대해 주었다. 민망한 순간이었다.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인종차별을 당하고 말았다. 가게 안에서 마그넷을 사던 짝꿍을 기다리며 멍때리고 있는데 건너편 도보에서 "니하오! 칭챙총!"을 외치며 손을 흔들어대는 무지한 자식을 만난 것이다. 말로 타이를까 했지만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써 봤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치켜뜬 채 그 자식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째려봤다. 그놈은 내가 눈빛을 바꾸자마자 손을 내렸고 약간 무서워하며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아,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상한 사람에겐 이상한 사람처럼 대응하면 되는 거였다.
이후론 걸어가는 내내 누가 시비라도 걸까 성난 눈을 하고 다녔다. 짝꿍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다독였다. 힐링과 스트레스가 함께였던 수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