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점이라 한다면, 맹견이 가족에게 충성스럽고 타인에게 적대적인데 반해, 이 아이는 주로 가족에게 으르렁거린다는 것 빼곤.
본래 타고나길 개띠와 찰떡인 캐릭터였다.
어쩜 매사 호기심 투성이고, 한시를 가만히 있질 못하는지 어릴 땐 이 활동적인 에너자이저 때문에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놀아도 놀아도 끝이라곤 없었다.
라운드마다 오르는 도전자들을 모두 K.O 시키고 나서도 ‘나는 아직 목마르다!!!’ 포효하는 무적의 챔피언처럼.
고단한 하루의 끝, 지친 나에게 “내일은 뭐하고 놀 거야?”라며 묻는 똘망한 눈을 보면 이 도돌이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히 흐른다.
육아 고난도의 시기를 지나니 좀 수월해졌고, 기관을 보내보니 확실히 이런 성격엔 장점이 많았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를 둔 또래의 부모들은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감정에 솔직하고 뭐든 적극적인 아이는 학교생활을 누구보다 즐거워했고, 친구관계 또한 늘 좋았다.
정 반대 성격의 남동생이 태어나서 겪어 보니, 이건 아이가 나에게 준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의 성격이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미 결정되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바뀔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고 어느 정신분석학자가 말했던가.
외향 중에서도 분명한 외향, 색으로 따지자면 선명한 빨강이던 아이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 조짐은 중학 입학 즈음부터 나타났다. 눈에 띄게 변한 건 파이팅 넘치는 근성이었다.
음의 인간인 나는 항상 뜨겁고 적극적인 아이의 기질이 부럽고 좋았는데 그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뭐든 못 해 안달이던 아이는 ‘안 해,’ ‘하기 싫어.’를 입버릇처럼 말했다.
부모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동안 욕심 없는 쿨 한 엄마 행세를 하던 나는 이 시기를 지나며 내가 욕심 많은 엄마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종 교내 활동이나, 대회 같이 승부욕을 불태우며 참여했던 일들은 하지 않겠다 선포했고, 언제나 무리에 앞장서 이끌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눈에 띄지 않는 중간자리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다른 개띠라는 사실 따위에도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가지던 아이는 이제 남들과 다른 건 그냥 싫다고 했다. 자신감을 되찾아주기 위해 전에 없는 칭찬도 하고 설득도 했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자신감 상실과 무기력증이 사춘기의 또 다른 증상이라고 처음부터 생각 못했던 건 그 밖의 것들은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거리두기로 인해 등교 수업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이는 여전히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나와의 대화나 외출도 즐거워했으며 깔깔 잘 웃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도 이러한 변화의 원인이 사춘기에 있다고 단정해서 말하진 못하겠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뭐든 잘 해내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도 있었을 것이고, 학년을 진급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사춘기 호르몬을 만나 마법을 부리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복장이 터지더라도 아이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이가 태어나고 함께한 오랜 시간 동안,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아이는 자신의 많은 부분을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실, 엄마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우리들은 ‘이 아이는 예민해요.’ ‘나와 달라 힘들어요.’ ‘맞추기 까다로워요.’
아이로 인한 힘듦에 대해 끊임없이 토로하지만 정작 아이들도 엄마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단 사실은 모른 채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요구를 묵살하는 아이에게 ‘이노무 자슥 봐라?’하고 쌍심지를 켜는 것이다.
각기 다른 사춘기에 정답은 없겠으나 대치가 길어질수록 잃는 건 많고 소득은 없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기란 항상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 아이가 그동안 나에게, 내 요구에 맞춰 주었던 수많은 것들을 떠올려보면 이해는 조금 쉬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