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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dame Byun Apr 22. 2022

이달의 맛

아이의 사춘기는 시기도 강도도 발현 증상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부모로서 제일 운 나쁜 케이스는 일찍 시작돼 늦게 끝나는 경우이다. 물론 방황의 시간만큼 성찰과 성숙이 함께 영글어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중2병이라고 불리는 사춘기의 클라이맥스에도 아이는 큰 사고나 문제없이 무난히 지나가는 중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건의 발단은 숙제였다.

학원 선생님이나 과외선생님으로부터 비교적 성실하다는 평을 받는 아이는 완성도가 떨어질지언정 과제를 이유 없이 펑크 낸 적은 없었다.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가 곧 본인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숙제를 빼먹음으로 이미지에 흠집이 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멋지고 완벽해 보이기 위한 노력은 생활 전반에 체로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사수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지난 기말고사의 충격 이후로 아이는 방학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학원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었고 의욕적으로 덤벼드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걱정은 됐지만 방학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거니 넘겼다. 그런데 문득 이상하게 너무 평화롭단 생각이 들었다. 

내 비장의 '촉'이 발동될 타이밍이었다. 불길한 쪽일수록 그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나의 sixth sense.  



- 접근금지! 육감 수사단 -

이번에도 나의 육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이는 문제 해설지를 이용해 과제를 완성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답을 보고 베낀 것이고, 베끼는 게 가능한 과목들은 그런 식으로 때운 것 같았다.

얼마  나의 잔소리 '아서 하고 있다'며 짜증스레 대꾸던 걸 떠올리니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맘 같아선 한 판 뒤집어엎어 사춘기고 뭐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싶었지만 냉정을 찾고 이일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후 느지막이 아이 방으로 갔다.


사고 당사자임에도 아이는 나보다 태연하고 냉정해 보였다. 그간의 행적이 발각되었음을 알고도 한참을 입만 꾹 다물고 있다 대답 좀 해보라는 나의 채근에 입을 열었다.

    

"내가 엄마를 위해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엄마가 화내는 건지 모르겠어."


'뭐라....!?'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깟 일이 뭔 대수냐는 태도에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이성의 둑이 무너져 내렸다. 언성이 높아지며 꾹꾹 눌러왔던 말들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그래! 비싼 돈 버려가며 돈 낭비 체력 낭비할 바에야 때려쳐. 어차피 망해도 니 인생, 열심히 라고 애원하는 사람 없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비난의 말들을 듣고만 있다가 아이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내 안의 화가 한풀이처럼 쏟아져 나오고 에너지가 바닥날 무렵, 아이는 '잘 시간이니 그만했으면 좋겠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여기서 또 한 번의 히트는, 그 와중에 미모 사수를 위해 부엌 냉동실에 '부기 방지용 마사지 숟가락'을 정성스레 얼려두고 있던 것이었다!  

길길이 화를 내면서도 짠한 마음 걱정되는 마음이 뒤엉켜 있던 나는 순간 맥이 풀리며 깨달았다.


'아, 내가 원하는 답과 결과는 있을 수 없겠구나...'


물론 아이가 보인 태도가 백 퍼센트 진심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본인의 잘못이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 리는 없고 궁지에 몰린 사춘기 아이가 할 수 있는 대응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리고 무엇보다 하기 싫은 것들을 하게 할 요량이 내겐 없다.   

느낌이 왔다.


'아, 아직 제철이 한창이구나...'


이달의 맛!

요즘 아이는 나를 점점 더 너그럽게 만든다.

여전히 의욕이 없고 과제를 펑크내기도 하고 오로지 관심사는 친구와 SNS 뿐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놀 때 놀더라도 과제는 챙기자." 정도이며,

얼마 전 내 허락 안중에도 없이 수선집에서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 왔을 때도  

"...... 그래 얼마 줬니?"라고 어금니 꽉 깨물어 하고 싶은 말은 삼킬 수밖에.


그렇다. 사춘기가 싱거울 리는 없었다. 그것은 논리적 이해나 설득도 통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고집하며 제 갈길을 가는 독보적인 맛이다.  

특히 이번 달 시된 '이달의 맛'은 그동안 안 먹어본 이다. 앞으로  세고 강한 맛이 나올 수 있으니 대비를 단디 하라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는 명언이 절절히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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