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의 제목과 내게는 밋밋하게 느껴진 표지의 디자인이 별로 끌리지 않았다. 이건 지금도 변하지 않은 생각이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주문한 이 책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포장 박스를 뜯고 기대나 설레임은 집에 놔둔 채, 한 손으로 책을 들고 자주 가던 김밥집으로 걸어가면서 처음 펼쳤다. 그런데도 책에 빠져드는 데 다섯 페이지면 충분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뀐 줄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의 걸음을 곁눈질 하여 걸어 간 걸로 보아 제법 몰입한 듯 하다. 식당 안에서도 왼손으로는 책을 집고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질을 하며 내내 읽었다. 집에 돌아오는 중에도 비슷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국내 소설은 오랜만에 읽는다. 이전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러시아 소설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어렵기도 하고 자꾸 바뀌기도 해서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다 익숙한 이름이고 길어봐야 3글자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작은 아버지, 큰 아버지, 언니에 형부, 사촌, 동지, 이모, 당숙, 선생 등등... 책에서 표현하듯 ‘반봉건시대’답게 각종 호칭들이 난무했다. 심지어 이러한 호칭들은 관계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누구를 중심으로 하냐에 따라 나에게는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작은 아버지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막냉이삼춘이 된다.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 할머니 빼고 다른 호칭은 거의 써 본 적 없는 터라 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이 소설은 내가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 따위를 할 때나 쓰는 집중력을 쏟아부을 만큼 몰입력이 대단했다. 불과 두 세대 전의 한국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실제 사람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사실적 캐릭터들 뿐만 아니라 그 특유의 문체, 즉 단단한 표준어로 구사한 '나'의 내면과 정감 있는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한 대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지해질 법 하면 웃음을 자아내는 펀치라인들이 내 취향을 완전히 저격해버렸다. 한국인이기에 저항 없이 느낄 수 있는 표현들, 감성들을 읽는 것이 행복했고, 읽는 내내 한글을 더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서론이 길었는데 소설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초반부 아버지의 혁명가스러운 눈빛과 여기에 꼬리를 내리다 못해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부모를 그 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게 느낀다. 이방인을 읽어봤기에 이게 무슨 느낌인지 정확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무튼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 답게 화자는 '나'이나 '나'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설은 앞으로 '진행'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소설 속 시간대는 종횡무진 왔다 갔다 한다. 글의 분위기가 비극과 희극, 표준어와 사투리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똑똑흐다 싶으면 죄 뽈갱이였던" 그 시절 답게 아버지도 사회주의자로서 산에 목숨을 맡겼다. 봉건주의를 타도하는 사상 답게 아버지는 외동딸의 흡연도 개의치 않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지만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경희 언니를 타당하게 옹호할만큼 일평생 한 길을 한결같이 걸은 사람이다. 이러니 집안사람들이 아버지가 금이라 하면 금인 줄 알고 돌이라 하면 돌인 줄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아버지에게 소설 전체에 큰 존재감을 가지는 단 하나의 큰 결점이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빨치산의 딸로 살게 되고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게 되고 길수 오빠는 육사에 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아버지의 단 하나의 큰 결점은 바로 사회주의자라는 것이 아니라 '패배했다.'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싸움에서 졌다. 나는 오직 이것이 그의 유일한 죄라고 생각한다. '나'를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다. 마을을 불태우고 할아버지를 죽게 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군인들이다. 길수 오빠를 육사에 떨어뜨린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육사다. 주인공들은 비극에서 비롯된 커다란 감정의 방향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래서 눈으로도 보이는 아버지로 정하고 쏟아낸다. 마치 붉은 깃발만 보면 흥분해서 달려드는 투우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깃발 옆에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모른 채. 실제로 소설 속에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적 비판은 전혀 없다. 그저 패배한 진영으로만 비춰진다. '뽈갱이', '빨치산'과 같은 단어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단어들에는 오직 적개심만 담겨 있고 비판적 태도는 없다. 아마 아버지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끝까지 사상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합리주의자답다. 이렇게 합리적이면서도 가을철 시퍼런 낫보다도 서늘하게 찌르는 가족들의 원망에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앉아서 뻐끔뻐끔 담배나 태우던 아버지. 그는 왜 변명하지 않았을까? 감정은 늘 방향을 데리고 다닌다.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감정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이 방향을 잃으면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은 결국 본인이기 마련이다. 이성적인 것이라면 항상 바른 말을 하며 초를 치는 아버지가 감정적인 것에는 잠자코 온 가족의 것을 받아내는 아버지의 가슴이 참 심오하다. 순경을 그만두고 산에 찾아온 청년을 돌려보냈던 그 날, 질 전쟁임을 알면서도 싸운 스물 셋의 아버지는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남은 생의 질곡을 얼마나 멀리까지 보았을까? 도대체 얼마나 멀리까지 보았길래 눈앞에 전봇대를 보지 못하고 머리를 박은 것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그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고지식한 아버지 쯤으로 여겼던 평면적인 이해에서 점차 입체적으로 느껴지더니 끝으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차원에 있는 것 같은 '나'의 아버지.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 나는 아직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