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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Jul 20. 2018

지네에 물렸다

번역가에게 손가락은 밥줄인데!

오늘 저녁 메뉴는 수육과 김치였다. 수육에 넣을 파를 뽑으러 간 텃밭에서 지네가 딸려 온 모양이다. 파를 뽑아 흙을 털고 물로 씻어 칼로 썰 때까지 난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다. 파 뭉치를 왼손에 그러쥐고 송송 썰어 3분의 2쯤 통에 담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써는데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불주사를 맞은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


아마도 그때 나는 '어떤 존재'를 직감한 것 같다.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손을 세게 흔들다가, 다리가 많고 기다란 무언가가 악착같이 매달려 내 손가락을 물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잠시 후, 싱크대로 떨어져 나간 지네를 발견했을 때는 뜨거운 통증보다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그것'에 손가락을 물렸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다. 이제까지 모기가 아닌 벌레에 물린 적이 있었던가? 없다. 결단코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시골에 살긴 사나 보다. 얼음찜질을 하며 앉아 있는데 자꾸 꿈틀거리며 도망가는 지네가 떠올라 털이 쭈뼛쭈뼛섰다. 썰다 만 파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뒤늦게 나타난 남자 친구에게 나머지 파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한 뒤 멀찍이 떨어져 섰는데, 이럴 수가! 도마 위에는 몸이 반쯤 잘려나간 지네가 흐느적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녀석은 제 몸을 난도질한 '적'에게 최선을 다해 저항한 것이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네는 싫고 물린 데는 너무 아팠지만, 내가 걔를 먼저 괴롭힌 샘이니 원망만 할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앞으로 텃밭에 갈 때는 꼭 장갑을 껴야겠다.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겁도 없이 다녔다. 번역가에게 손가락은 밥줄인데! 장갑을 잘 끼고 뽑은 파는 그 자리에서 세게 흔들어 이물질을 제거해야지. 오늘과 같은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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