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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Jul 20. 2018

찬호께이, <13.67>

비정한 홍콩의 역사

홍콩 소설도 중화권 추리소설도 처음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동안 추리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추리물은 좋아하지만 소설보다 영화로 즐겼다. 읽은 거라곤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소설 몇 권이 전부다. 그 유명한 괴도 뤼팽, 셜록 홈스, 에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찬호께이의 <13.67>은 아주 신선했다. '중국에서도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구나', '영화로 나오면 반드시 찾아봐야지', '홍콩에 가면 거기는 꼭 가봐야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생소한 이름의 찬호께이는 대만에서 활동하는 홍콩 작가인데 대학에서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하고 재미 삼아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2011년 <기억하지 않음, 형사>로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았고, 2014년 발표한  <13.67>로 2015년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여섯 개의 단편이 옴니버스처럼 이어는 이 작품은 전체를 하나의 장편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큰 줄기는 홍콩의 천재적인 경찰 관전둬와 파트너인 뤄샤오밍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과 그들의 성장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관전둬의 활약상은 2013년부터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편마다 수십 년씩 (뒤로) 점프하지만 각각의 사건과 인물이 새로운 판을 짜기 때문에 이음매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시점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와 맞물려있다는 점이다. 관전둬는 홍콩 사회가 격변하는 과정을 이야기를 통해 체험한 인물이다. 따라서 사건을 통해 1967년 좌파 폭동과 1970년대 염정공서 분쟁, 1980년대 삼합회 분열, 1997년 7월의 홍콩 주권 반환, 밀레니엄을 앞둔 혼란스러운 홍콩의 모습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은 겉으로는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동안 정치, 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를 거친 홍콩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비정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복선과 암시, 예상치 못한 반전이 더해져 빠르게 전개되는데 넋 놓고 보다가는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기 십상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발췌]
p.16 재치 넘치고 노련하면서 고결하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그리고 돈 몇 푼도 세세하게 따지는, 이렇게 독특하고 괴상한 인물인 관전둬는 1960년대의 좌파 폭동을 겪었고, 1970년대의 경찰과 염정공서 분쟁을 버텨냈으며, 1980년대의 강력범죄에 대항했고, 19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을 목도했으며, 2000년대의 사회 변화를 증언하고 있다. 수십 년간 묵묵히 수백 건의 사건을 해결하며 홍콩 경찰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p.18 경찰이란 나쁜 놈들을 없애고 착한 사람들을 지키며 정의를 수호하는 신성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경찰이 된 후배들 중 많은 수가 경찰을 '신분'이 아니라 '직업'으로 여겼다. '범죄를 원수 보듯 한다'거나 '악행을 증오하고 견제한다'는 말은 그저 표어에 불과했다. 그들은 일을 잘 해내기보다 무사히 끝내기만을 바랐고, 직무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되도록 빨리 몸은 편하고 월급은 많은 직책으로 승진하고 싶어 했다.

p.112 다른 사람들이 평온하게 백색의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관전둬는 계속 흑과 백의 경계를 떠돌았다. 뤄 독찰은 알고 있었다. 비록 경찰이 진부하고 관료적이고 권력자와 결탁하고 정치적 임무를 우선적으로 집행하는 조직으로 변한다 해도 사부만큼은 변함없이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킬 거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그가 인정하는 공공의 정의를 지켜낼 것임을. 경찰의 사명은 진실을 밝히고 범죄자를 체포함으로써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악당을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진실을 덮으려 한다면 관전둬는 자기 자신을 시커먼 늪에 던져 넣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방식 그대로 그들을 상대할 것이다.

p.129 이 번화한 모습이 바로 홍콩의 축소판이다. 이 도시의 생명은 경제와 소비에 기대어 지탱된다. 그러나 그 버팀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튼튼하지 않다. (...) 몽콕은 절대 작동을 멈추지 않는 엔진과 같다. 낮의 연료도 돈이고 밤의 연료 역시 돈이다. 합법적인 연료가 모두 소모되고 나면 불법적인 연료가 너무 쉽게 빈틈을 헤집고 들어온다.

p.245 수많은 홍콩 사람들이 주권 반환 후의 사회환경에 의문을 품고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을 선택했다. 영국 정부는 홍콩의 수백만 시민 모두에게 영국 국적을 주는 방안은 부결시켰지만, 공무원들이 대량으로 빠져나가 정부 기능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히 영국시민권 계획을 실시했다. 자격을 갖춘 홍콩 공무원이라면 영국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안심하고 홍콩에서 근무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p.403 오랫동안 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인에 대한 '가난하고 문명화되지 못했다'는 고정관념은 홍콩 사람들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론은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확대와 과장을 즐겨 한다. 대륙에서 홍콩 사람이라면 다 돈을 좋아하는 장사치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홍콩에서도 모든 중국인이 거칠고 무식하다고 믿는다. 똑같이 편협한 생각이었다.

p.474 그레이엄 힐은 영국인이다. 홍콩으로 일을 하러 온 다른 서양인들이 그런 것처럼 중국어로 음역해 샤자한 (夏嘉瀚)이라는 한자 이름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조금 우습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인데 중국어로 이름을 짓고, 홍콩 사람들은 유행처럼 스스로 영어 이름을 붙인다.

p.580 이 시대는 이렇게나 괴상했다. 나는 매일 형과 내가 어디선가 폭탄이 터져 죽을까 걱정하고, 치안은 나날이 나빠지고, 정부는 전복될 위기였으며, 사회는 마비되었고, 도시는 전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집주인 아저씨를 대신해 가게를 보고, '좌파 폭도' 이웃과 아침인사를 나눈 다음 '파시스트' 경찰에게 음료를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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