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같은 단지 내, 다른 동으로 이사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었다. 아내가 직접 알아보고, 결정하고, 이사를 제안했다. 그만큼 아내는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며 우리는 함께 청소하고, 가구 배치를 고민하고, 짐을 정리했다. 작은 것 하나까지 손을 맞잡고 꾸려나가는 시간이 쌓였다. 그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가 ‘함께’라는 것을 확인했다.
추운 겨울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었고, 하얀 입김이 창가를 가렸다. 하지만 우리 집 안에는 따뜻한 공기가 돌았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설렘 속에서 우리는 분주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 겨울의 끝자락,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아내에게 드리웠다.
"다시 그 감정이 찾아온 것 같아."
어느 날, 아내가 낮게 속삭였다. 나는 한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울증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까지 세 번의 시간을 함께 지나왔지만, 네 번째도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고 예고 없이 몰아쳤다. 이번엔 새로운 환경이 원인이었을까. 낯선 공간에서의 불안, 겨울의 싸늘함이 아내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든 걸까.
둘째는 겨우 두 살이었다. 아직 부모의 품이 필요한 아이였다. 아내는 다시 일상 속 작은 것들마저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나는 고민 끝에 네 번째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다시금 모든 것이 나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미 우리는 함께 몇 번이나 지나온 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작은 화분 하나를 집에 들여놓았다. 그날부터 아내는 꽃과 다육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새로 온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과도 가까워졌다. 아내보다 한참 연배이신 그분은, 마치 돌아가신 장모님처럼 다정하게 아내를 보살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내에게 성경책을 건넸다.
"이 안에 네 마음을 위로해 줄 문장이 있을 거야."
아내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점차 책을 펼치고, 글을 읽고, 의미를 곱씹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교인 모임에도 참석했다.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질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내는 조금씩 변화했다. 우울의 늪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말수가 늘었고, 표정이 부드러워졌으며, 다시 아이들과 밝게 웃는 날이 많아졌다. 아내를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신을 믿지 않지만, 아내를 살려준 신에게 감사한다."
언젠가 아내가 말했다.
"꽃을 가꾸면서 알게 됐어. 어떤 꽃은 겨울에도 피더라고. 눈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피어나.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우리의 겨울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아내는 다시 일어섰고, 우리는 또다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아내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날도 있다. 때때로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나는 조심스레 묻는다.
"요즘 좀 이상하네? 기분이 다운돼?"
그럴 때마다 아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도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번엔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느새 우리는 또다시 계절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봄이 스며들고 있다. 꽃봉오리가 맺히고, 나뭇가지마다 연둣빛 새순이 올라온다. 아내가 가꾼 작은 화분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믿었다.
우리의 봄은 계속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