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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이유가 있다

by 오분레터

"네가 먼저 사과해."
"아니, 네가 먼저 물러서."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별것 아닌 일로 시작된 다툼이 서로의 자존심만 자극한 채 끝이 나지 않았다. 결국 주변 어른이 끼어들거나 누군가 눈물을 흘려야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곤 했다. 먼저 물러서면 지는 것 같고,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 같아 끝까지 버티야 했다.


최근 뉴스를 보다 문득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관세 전쟁이 꼭 그 시절의 싸움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에 성공한 후, 곧바로 세계 각국을 향해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구호 아래, 그는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력한 관세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대상은 거의 전 세계였지만, 특히 중국을 향한 조치는 노골적이었다. 중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고, 중국 정부는 곧바로 보복관세로 대응했다.


특히 중국과의 상황은 더 격화되고 있다. 트럼프는 재차 경고했다. “보복관세를 철회하지 않으면 50% 관세를 부과하겠다.” 경제 전문가들은 두 나라의 자존심 싸움이 결국 전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줄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양국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누가 먼저 고개를 숙이느냐가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정말 이 싸움은 국가의 이해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경제 논리만으로 보기엔, 두 지도자의 감정적 자존심이 지나치게 개입된 건 아닐까? 마치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끝나지 않던 그 싸움처럼, 이 상황도 누군가 먼저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갈등을 겪는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그 갈등이 길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같다. ‘먼저 물러서면 지는 거야.’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고의로 말을 아끼고, 감정을 숨기고, 때론 침묵이라는 벽을 쌓는다. 사실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감정이 굳어지고 싸움의 본질은 흐려진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팀 프로젝트를 하다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 그 동료와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다기보다는,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부담스러워졌고, 결국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단절된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친구도 내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고 했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이후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한 걸음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보’를 ‘패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함을 안고 버틴다. 양보는 미덕이 아니라 약점으로 여겨진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부쟁지덕(不爭之德)’이라는 말이 있다. ‘다투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덕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싸우지 말자는 도덕적인 권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짜 강한 자는 굳이 싸우지 않아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는 깊은 통찰이다.


누군가 먼저 멈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약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다스릴 줄 알고, 상황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양보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직장에서 팀원과 갈등이 생겼을 때, 가정에서 배우자와 대화를 이어가지 못할 때, 우리는 종종 ‘상대가 먼저 말해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순간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가 먼저 말한다고 해서 정말 지는 걸까?’ 그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넴으로써 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내가 더 강한 거 아닐까?’


세상에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아무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먼저 멈춰야 싸움은 끝난다. 그리고 먼저 멈추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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