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다려주는 풍경

by 오월

하루를 버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 나를 기다려주는 건 뭐지?’


사람이 아닐 때도 있다.

대부분의 날들엔 오히려 사람이 아니다.

조용한 방, 늘 그 자리에 있는 의자,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길,

집 앞 가로등 아래 작은 나무 한 그루.

그 풍경들이 나를 기다려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기다림’을 관계에서만 찾는다.

누가 나를 기다려주는지,

내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하지만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풍경도 우리를 기다린다는 걸 알게 된다.


매일 지나치는 길가에

늘 똑같이 서 있는 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내가 웃을 때도,

울고 싶을 때도,

지쳐 고개를 떨군 채 걸어갈 때도

한 번도 자리를 바꾼 적이 없다.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내 하루를 묵묵히 통과시켜준다.


나는 그 나무를,

그 풍경을,

아마도 며칠,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풍경은 늘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빨리 걸어갈 때도,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걸을 때도,

말 없이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어떤 날은 버스 창가에 앉아

늘 다니던 길을 바라보다가

새삼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풍경은 늘 나보다 먼저 여기 있었구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지,

적어도 내가 이 길을 걷기 훨씬 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내 삶과 겹쳐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풍경은 조용히 나를 기다려주기 시작했다.


기다려준다는 건,

있어주는 일이다.

사라지지 않고,

함부로 변하지 않고,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통과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집 근처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

항상 보이는 작은 카페가 있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그 카페 불빛이 켜져 있다는 것만으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아, 아직 이 시간에도 빛나는 공간이 있구나.’


나는 그 카페에 거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곳은 내게 ‘기다려주는 풍경’이 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든 말든 상관없이,

그저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를 가만히 안아주는 공간.


때로는 집 안의 풍경이 나를 기다려준다.

현관문을 열면 마주하는 신발장 위의 작은 조명,

거실 구석에 놓인 낡은 소파,

책장에 꽂힌 책들,

늘 같은 자리의 머그컵.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돌아올 것을 전제로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에도,

그 풍경은 그대로 나를 기다린다.


우리는 자꾸만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인정,

누군가의 관심만을 기다리느라

이렇게 조용히, 묵묵히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들을 잊고 산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음이 너무 지쳐

아무에게도 연락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를 받아주는 건

대부분 사람보다 풍경이다.


문을 열면 그대로인 방,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린 탁한 공기,

‘잘 다녀왔어?’라고 말해주는 듯한 조용한 정리 상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것들.


나는 이런 풍경들을 떠올릴 때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없어도 계속 흐르고,

그러면서도 내가 돌아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맞이해주는 공간들이 있다는 사실이.


삶이 너무 벅찰 때,

나는 사람 대신 풍경에게 기대곤 한다.

창문을 열어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거나,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천장에 드리운 어둠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같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기다려주는 풍경 속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기다려준다는 건,

한 사람의 속도를 인정해주는 일이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 않고,

왜 늦었냐고 다그치지도 않고,

그저 ‘네가 오고 싶을 때 와도 괜찮아’라고

자리를 비워두는 것.


풍경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오늘 조금 늦게 돌아와도,

내일 잠시 돌아오지 않아도,

당분간 이 길을 걷지 않아도,

풍경은 서둘러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안다.

‘아, 이 자리는 그대로 있었구나.’


그 깨달음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세상이 다 변해버린 것 같을 때도,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질 때도,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 있다는 사실.

그건 우리가 다시 걸어갈 용기를 내게 하는

조용한 기반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풍경이 될 수 있다.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거창한 말을 해주지 않아도,

그저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은,

늦어져도, 한동안 소식이 없어도

“그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말 없이 말해주는 존재.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삶 속에

부담이 아닌 풍경으로 머물러주는 사람.

힘들 때 떠올리면,

‘그래, 거기 아직 있겠지’ 하고

마음 한편이 느슨해지는 사람.


오늘 하루도

우리는 수많은 풍경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풍경들 중 몇몇은

언젠가 우리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려주는 풍경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위로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도,

내가 자꾸 흔들려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뜻이니까.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외로워진다.


어쩌면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갈지,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가끔은,

그 풍경 앞에 잠시 서서

조용히 인사해도 좋겠다.


“오늘도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 한마디가,

당장 우리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다음 하루를 조금 더 견디게 해줄

작은 숨이 되어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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