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세상에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되레 아이들에게 배워야겠다.
오늘도 역시나 반에 꼭 한 명은 종 치기 전에 어김없이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 저 질문 있어요!
질문에 답을 해주어도 모든 설명에 덧붙여지는 또 다른 “왜요?” 가 무한 반복으로 나올 때면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당황스럽지만 질문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 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왜요?’라는 꼬리의 꼬리를 무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손을 들고 했던 터무니없는 '왜' 들의 연속을 직접 들으니 '어쩌면 그 당시의 어른들도 아마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모든 질문들에 대답을 못해주었던 걸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에게 이미 입력되었다고 생각을 하며 가르치는 문장들 속에서도 방심하다 보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거나, 끊임없이 파고드는 질문 속에 ‘본질’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걸 알게 된 시점부터 '핵심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들은 결국 아이들의 순수한 물음표 속에 들어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아이들이 하는 ‘왜?’라는 단어가 ‘그냥’의 의미로 다가오기보다 ‘순수한 의도’ 속에 들어 있는 ‘왜’들을 곰곰이 살펴본다.
나 또한 '왜'라는 의문이 생기는 날이 올 때면 아이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시선을 물어보곤 한다. 그렇게 함께 찾아내며, 탐구하는 시간 속 서로의 모습에는 살아온 시간과는 상관없이 내가 되려 아이가 되어 있거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있거나, 경계가 무색할 정도로 허물어진 우리를 바라본다.
그날 나는 우리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일지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우리는 이미 본 것을 지울 수 없고, 자라온 환경, 경험 등 쌓이고 쌓인 시간들에 갇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사고가 굳어가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보려고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적어도 남은 삶을 낭만 있게 살아가고 싶은 나에게는 아이들이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우리들은 세상에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