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글쓰기 챌린지 Day 18 슬픔
“현대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냐.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을 읽는데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인생은 짧으니까."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 숲'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시간의 세례’라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시간의 ‘세례’ 덕분일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사건과 감정도 시간의 세례 속에 희석되어 결국 잊혀진다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슬픔
그런 슬픔이란 무엇일까.
어떤 슬픔이 잊혀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간 것이며 또 어떤 형태로 어떻게 남아있는 걸까. 그럴수록 그것은 인생의 큰 부분이고, 또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내가 가진 슬픔의 기억들을 더듬어 봤다.
상실과 부재에서 비롯된 슬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부터의 슬픔.
그러다 오래전 유년의 기억 속 처음 상실을 접했던 기억을 꺼내 올렸다.
어릴 적, 아빠가 토끼를 두 마리 데려 오셨다.
동생과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졸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좋았다. 토끼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도 시키고, 풀밭에서 풀을 뜯어먹는 그 당연한 모습도 그때는 그렇게 신기했다. 그 보드라운 털북숭이가 내 손안에 들어올 때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처음 키워보는 반려동물.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그 시절 우리는 동물을 그렇게 보호하고 잘 키워낼 줄 몰랐다. 때로 먹이도 잘 먹지 않는 날이 있었고, 지금 떠올려보면 서툰 아이의 손길이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토끼를 데리고 할아버지댁으로 갔던 어느 주말, 토끼가 죽었다.
묻어둔 그날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보니 신기하게도 또렷이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처음 겪는 아끼는 존재의 상실은 너무 큰 슬픔이었다. 내 안의 한 세계가 무너져 내렸던 것 같다.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엄마는 내가 며칠을 자다가도 울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슬픔을 겪은 딸을 위해 한 마리의 토끼를 더 데려왔지만, 올 때부터 유난히 작고 병약했던 토끼는 밥도 잘 안 먹더니,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두 번의 상실을 겪은 뒤, 부모님은 더 이상 딸에게 상실의 슬픔을 주고 싶지 않으셨는지, 우리는 그 이후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잊혔다 생각했는데, 한 번씩 토끼를 보게 될 때면 소나기처럼, 한 번씩 어린 시절의 나와 그 작은 생명이 같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월이 지나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떠오르지도 않는데, 할아버지댁 뒷산에 토끼를 묻어주고 울면서 내려왔던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재생됐다.
슬픔은 잊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모든 슬픔들은 내 속에 이미 녹아들어 있었다. 날이 서있던 슬픔이 무뎌졌을 뿐,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슬픔을 녹여내는 과정에서 무뎌짐에 익숙해진 내가 그저 그 슬픔이 잊혔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문득 그 기억을 잊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 한편에 자리를 내어주고, 때때로 불쑥 그곳에 들러도 좋을 것 같다.
토끼와 어린 날의 내가 같이 있을 클로버 들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