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단배

1. 바다 그리고 파도

by 꿈꾸는오월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내키는 대로 잔뜩 사 온다.

이미 책장에 한가득 쌓인 책을 정리도 하기 전에. 그렇게 사 온 책 중엔 물론 완독 하지 못한 것도, 혹은 이미 나를 기다려온 지 오래된 것도 많다.


책에 관한 알 수 없는 물욕이 나를 지배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매번 저지르고 만다. 시간이 남아 잠깐 들어간 서점에서도, 어떤 날이면 갖고 싶은 책을 발견한다. 그러다 나오는 길, 돌아보면 내 손은 섬광이 되어 책을 들고 있다. 그런 날은, 어쩌면 나에겐 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물욕의 근원이 유년에서부터 흘러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1999년 12월 25일

예쁘고 똑똑한 너에게

지금처럼 열심히 책 많이 읽고 넓고 깊은 생각 주머니를 가진 공주가 되세요.

내년에는 조금 더 의젓한 언니가 되길 바라요.

여기 두고 가는 용돈은 내일 읽고 싶은 책 사 보세요.

- 너를 사랑하는 산타가.



매번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는 선물과 함께 카드를 놓고 가셨다. 이상하게도 산타 할아버지의 필체는 엄마 아빠의 필체와 같았다. 산타는 왜 엄마와 아빠의 필체를 남겼던 걸까. 어린 마음에 같은 필체가 궁금했지만, 그때마다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가 엄마아빠의 필체까지 따라 쓴다고 하셨다. 일부러 그렇게 써서 우리에게 친근함을 주려고 했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어린 마음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심지어 역시 산타할아버지는 어린이에게 다정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산타할아버지, 아니, 엄마는 책을 많이 사주셨다. 공부나 책을 채근한 적은 없었지만, 그저 책을 가까이하게 해 주셨던 것 같다. 집엔 늘 책이 있었다. 방 한쪽 벽 가득 책장이었다. 책장은 꽤 강한 책임감에 휘어지더라도 무거운 책들을 버텨내주었다. 책장 맨 아래 꽂힌 아빠의 두꺼운 전공 서적과 빛바랜 소설 『동의보감』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책을 고를 때면, 언제나 선택은 내 몫이었다. 그것이 동화책이든, 만화책이든, 혹은 글자만 빼곡한, 누가 보아도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이어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돛단배처럼 서점을 흘러 다녔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 책 저 책 사이를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엄마는 그저 계산대 앞에서 책을 받아 들었다. 그 어떤 이유도 묻지 않은 책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만선의 기쁨을 안고 항구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여름 방학, 매미 소리 가득한 바람이 불어올 때, 엄마는 십자수를 놓고, 나는 옆에서 엎드려 잔뜩 사 온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읽은 책도, 엄마의 십자수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순간은 사진처럼 머릿속에 선명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엄마가 그런 방식으로 나를 길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저 이유를 묻지 않고 내 마음대로 책을 고를 수 있는 그 자유만이 좋았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것은 단순한 배려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 그 대가로 고른 책이 너무 어려워 몇 장 넘기지 못해도, 읽다가 흥미를 잃을지라도 엄마는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다. 사놓고 완독 하지 못한 책들도, 이해하지 못한 책들도 꽤 많았다.


그렇게 오독과 미완의 독서가 쌓여갈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더 나은 독자가 되었던 것 같다. 끝까지 읽지 못한 책들, 혹은 마음대로 읽어낸 책으로부터도 항해하는 법을 배우면서.


한 번씩 서점에서 책 읽는 아이들을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서점에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그냥 마음껏 책을 고르는 것을 기다려준 엄마도. 어린 시절, 엄마는 나에게 책의 자유를, 그리고 방향의 감각을 가르쳐 준 것 같다. 어쩌면 엄마가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자유로웠던 방향 감각이 때론 우리에게 와류를 일으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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