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에게 있어 칼같이 잘라내야 하는 결정적인 두 마디는 ‘손절’과 ‘익절’이다. 세상에 신묘한 기법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저 신기루이자 허망한 신화일 뿐이다. 많은 투자자가 그 신묘한 기법을 신기해하며 신나게 빠져들지만, 그 끝은 김밥처럼 긴 세월 돌돌 말리거나 광어·우럭처럼 큰돈들의 횟감이 되어 상추쌈에 말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기 일쑤다.
상수와 하수의 차이는 한두 번 수익의 크기에 있지 않다. 상수로 무게추가 옮겨간다는 것은 확률 중심으로 사고 체계가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지금 자리는 확률이 높지만, 아닐 때도 많으니 아닐 때는 이렇게 대응하겠다”라는 덤덤함. 어떤 파동을 맞닥뜨리더라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라고 받아들이는 여유로움. 이 사소해 보이는 심리적 격차가 하루하루 시간이 쌓이고 매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극복할 수 없는 상수와 하수의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기법은 신화에 가깝지만, 대응은 현실이다. 상추쌈의 횟감이 되지 않으려면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신묘한 비책을 찾아 헤매는 대신, 내일의 시장이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현상에서 헤매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 싫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어 불리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기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 그것이 만인의 본성이자 군중의 한계다. 그 시점으로 돌아간들 결코 하지 못했을 행위들을 후회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허송세월이다. 개인투자자가 거대 자본과 맞설 무기는 '융통성'과 '효율성'이다. 본성을 거스르는 고통에 매몰되기보다 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략, 즉 손자병법의 삼십육계와 같은 유연한 ‘치고 빠지기’가 필요하다.
개인은 양손에 예리한 단칼을 쥐고 기회를 엿보는 자객이 되어야 한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때다‘ 싶으면 민첩하게 올라탔다가도 만약 흐름이 어긋난다면 왼손에 쥔 단칼로 미련 없이 끊어내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기회가 오면 재차 올라타서 파동의 흐름을 즐기되 스스로 정한 챙김의 마지노선에 닿는 순간 오른손에 쥔 단칼로 수익을 베어내야 한다.
후회는 집착의 산물이다. "그때 그렇게 해야 했는데"라는 후회는 집착에 마음이 묶여 있다는 증거다. 후회는 후퇴하는 자의 전유물이다. 지금 흐름에만 집중할 때, 후회는 기쁨에 닿게 될 것이다. 승부의 요체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결단에 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을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다. 만약 남들이 짓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명나라 왕조의 질식할 것 같은 유교 사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했던 시대의 이단아 이탁오가 했던 말이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면, 뇌동과 추격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시장의 흔들림을 따라 짖어대던 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파동을 보고 뒤늦게 짖거나, 따라다니면서 헐떡이는 투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투자자는 오직 현재의 흐름에 온전하게 순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공의 공식은 명확하다. 인간의 본성인 성급함과 헛된 희망을 덜어내고, 범인은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지루함을 견뎌내야 한다. 감정의 기복이라는 인간 최대의 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임을 인정하고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도, 성공의 토대를 다지는 복기와 반복의 시간도 결국 지루하기에 값진 것이다. 그 지루함의 무게를 견디는 자만이 필연의 시간을 지나 고원에 닿는다.
지루함은 명작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지루함은 실력이 숙성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증거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꿈꿀 때는 결코 지루함이 찾아오지 않는다.
“위험이란,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워드 막스의 이 문장을 투자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처럼 늘 쓰고 있어야 한다. 위험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가장 먼저 위험의 실체를 이해해야 하며, 위험이 임계치에 달했을 때 그것을 예민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위험을 철저히 제어하는 데 있다. 흔히 위험을 변동성과 동일시하지만, 투자 현장의 진실은 다르다. 투자자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위험은 소중한 자본금을 영구히 잃을 가능성 그 자체다.
모든 투자자는 자신의 계좌에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만이 가득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마음이 쉬지 않고 만들어 내는 ‘욕심’이라는 짙은 먹구름은 그 햇살을 한낱 이룰 수 없는 염원으로만 남겨둘 뿐이다. 감정의 실타래가 엉망으로 꼬여버린 계좌에는, 본능의 먹구름이 내뿜는 차가운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하락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원칙이라는 든든한 우산조차 챙기지 못한 이들의 계좌는 사계절 내내 축축한 장마철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심리가 당신 계좌의 내일 기상도를 결정하는 유일한 변수다.
위험은 돈을 잃을 가능성이다. 변동성이 아닌 자본 손실을 경계하라. 위험을 제어한다는 것은, 내 안의 욕심이라는 먹구름을 걷어내고 원칙의 우산을 펴는 행위다.
“인내심이 필요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저쪽 풀밭에 앉으렴. 내가 살짝 곁눈질로 널 바라볼 거야. 넌 아무 얘기도 하지 마. 언어는 오해를 낳거든. 그래도 날마다 내게 조금씩 더 가까이 와서 앉아.”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건넨 이 짧은 경고는, 변덕스러운 파동이 투자자에게 던지는 가장 준엄한 꾸짖음과 같다.
파동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성급함과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불쑥 다가와 칭얼대지 말라고. 그저 꾸준하게, 길게 보면서 복기하고 반복하며 아주 천천히 다가오라고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자만이 파동의 진실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시장에서 지지저항이라는 잣대를 들고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언어'를 버리는 것이다. 예측이라는 화려한 수식과 변명은 오해를 낳을 뿐이다. 아무 말 없이 원칙의 자리를 지키는 기계적인 매매만이 파동과 나를 온전히 하나로 이어준다. 시장에 쏟아 내는 "올라갈 거야", "이번엔 달라"라는 언어들은 불안이 빚어낸 오해에 불과하다.
언어(예측)는 오해를 낳고 침묵(원칙)은 신뢰를 낳는다. 서두르지 마라. 파동이 마음을 열고 수익의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그저 지지저항의 풀밭 위에 묵묵히 앉아있어야 시장이라는 신비로운 시장은 곁을 내어줄 것이다.
한 소년이 있었다. 손절의 칼날을 거두지 말아야 함을 어렴풋이 알았으나, 소년에게 투자는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웠다. 청년이 되었고 추세와 공간을 성급히 자르지 말아야 함을 배워 알았으나, 뜨거운 열정은 차가운 원칙의 벽을 넘지 못했다. 서른쯤 이미 눈에 보이고 나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샘솟는 아집과 생각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어느덧 중년의 남자가 되었다. 돈을 뒤쫓으면 돈이 도망간다는 이치를 깨달았으나, 불혹의 무게보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유혹의 힘이 더 강했다.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한 남자는 여전히 시장에 남아 있다. 이제야 파동은 그저 흐르는 물결일 뿐이며, 그저 다음 물결을 묵묵히 기다려야 함을 알아간다. 물이 차오르면 대응하고, 때가 되면 밀물이 들어오듯 그 순리를 받아들여야 함을 배운다. 생각으로 시장을 이기려 하면 감정이 엉켜 그걸로 끝이고, 욕심으로 시세를 쫓으면 발걸음이 꼬여 넘어진다는 것을, 그 남자는 온몸의 상처로 기억하며 여전히 시장에 남아 있다.
지나온 실패는 고쳐지면 거름이 된다. 소년의 미숙함도, 청년의 과욕도, 중년의 흔들림도 결국 순리라는 바다로 가는 필수적인 항로였다. 생각의 엉킴을 풀고 발걸음의 꼬임을 바로잡는 법은 오직 하나, 시장이 스스로 차오를 때까지 순리를 따라는 것이다.
“당신의 첫 번째 할 일은 자본을 지키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수익률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109세까지 현역으로 시장과 호흡했던 투자의 산증인 어빙 칸의 삶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교과서다. 그는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레버리지를 멀리했으며, 겸손한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그에게 투자의 제1계명은 수익이 아니라 자본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켜낸 자본이 있어야 수익률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와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소음은 과감히 차단해야 한다. 남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 군중과 반대로 움직여야 하는 투자의 승리 공식은 멀어질 뿐이다.
인간은 시장과는 정확히 맞지 않는 본능을 지닌 존재다. 상승장에서 추격 매수하고 싶고, 하락장에서 공포에 질려 매도하고 싶은 그 충동을 이해해 가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이 본능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만의 엄격한 원칙과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마음이 필요하다.
자본은 곧 당신의 미래이자 다시 일어설 기회다. 소음을 무시할 줄 아는 능력이 투자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실력이다. 자본이 살아있는 한, 시간은 언제나 당신의 편에 서서 무한한 기회를 줄 것이다.
투자에서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전지전능한 존재’인 양 독선과 자만에 빠져 행동하는 인간의 한계에 있다. ‘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마냥 버티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시장의 신호를 무시한 채 희망 고문에 빠지면, 주가가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된다.
시장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응의 대상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의 각도를 주시하며, 우상향할 때는 매도점을, 우하향할 때는 매수점만을 정직하게 찾으며 시장의 등락에 몸을 맡기면 그뿐이다. 가령 데이트레이딩 관점에서 10분봉을 기준으로 본다면, 하루에 서너 번 꺾이는 것이 일반적인 파동의 생리다. 아주 드문 강력한 추세가 아니고서야 시장은 매일 한두 번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측은 독선이고 순응은 실력이다. “가겠지”라는 위험한 예측은 뇌동매매를 부르는 파멸의 주문이다. 문제는 기다리지 못하고 양방향의 모든 파동을 다 먹겠다고 덤비는 예측의 탐욕이다. 시장은 많이 먹겠다고 칭얼거린다고 뭔가를 주는 곳이 아니다.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으므로 친절해야 한다고”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투자자의 ‘애씀’과 ‘견딤’은 제아무리 분석의 넓이를 더하고 깊이를 파고들어도, 결국 “위아래 어디로든 갈 수 있다”라는 겸손한 결론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그 쓸모를 찾게 된다. 최선은 오직 ‘나에게 유리한 확률’을 찾는 것뿐임을 깨닫는 것이 투자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원칙을 유리하게 세우고, 그것을 믿으며 반복으로 지켜내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기에 투자는 파고들수록 신묘하고도 어렵다. 성급함과 희망에 달뜬 채 수익만을 좇는다면 결코 이 깊은 이치에 닿을 수 없다. 배움의 과정 그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낸 자만이, 시장의 변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지속가능성의 고원에 도달할 수 있다.
행복은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 있다. 수익이라는 결과에만 집착하면, 그저 견뎌야 할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라는 시장의 속성을 인정하고 확률 게임을 즐기기 시작하면, 매일의 복기와 대응은 나를 완성하는 축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주식을 발등에서 사서 머리끝에서 팔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극히 어렵고 대개는 불가능하다.” 성장주 투자의 대가 윌리엄 오닐의 이 일갈은, 인간의 본능 속에 깊이 뿌리박힌 ‘최저점 매수·최고점 매도’라는 치명적인 허상을 직시하게 한다. 본능적으로 가장 싼 가격에 진입하여 가장 비싼 가격에 탈출하기를 갈망하지만, 그 완벽한 타점은 오직 신의 영역일 뿐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최선의 길은 어느 정도 상승의 힘이 증명된 시점에 올라타고, 고점의 기운이 꺾여 내려오는 시점에 과감히 뛰어내리는 ‘확인’의 과정에 있다.
윌리엄 오닐이 강조했듯, 진정한 매수 적기는 바닥의 지하실을 찾는 때가 아니다. 충분한 기간 조정을 거치며 에너지를 응축한 종목이 신고가를 경신하거나, 보합권의 단단한 저항선을 뚫어내며 자신의 힘을 ‘확인’시켜 줄 때가 바로 그때다. 반대로 매도 적기는 끝을 예측하는 때가 아니라, 주가가 거침없이 상승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앞으로도 영원히 오를 것이라 굳게 믿으며 환희에 젖어 있을 때다.
최저점과 최고점은 신의 영역이다. 투자의 본질은 신념에 찬 ‘확신’이 아니라, 현상을 목격하는 ‘확인’에 있다. 어깨와 무릎 너머를 시장에 양보할 때 비로소 '몸통'이라는 값진 수익을 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