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우지만, 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운다.” 역발상 투자의 선구자 존 템플턴이 남긴 이 말은, 마주하는 숱한 실패의 기록들이 헛되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조급함에 등 떠밀려 내린 선택들이 가난의 굴레로 회귀시킨다는 사실을, 대개 뼈아픈 대가를 치른 뒤에야 깨닫곤 한다. 야구가 매 순간 투수와 타자가 벌이는 27번의 치열한 수 싸움이듯, 투자의 세계 또한 매수와 매도의 에너지가 한 치의 양보 없이 충돌하는 격전장이다. 그 싸움은 시장이라는 타인과의 전쟁인 동시에, 흔들리는 나약한 자아와의 고독한 사투이기도 하다.
주자 3루의 위기 상황에서도 투수가 과감하게 유인구를 던질 수 있는 이유는, 어떤 공이라도 몸을 던져 막아낼 포수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투자자에게 그 포수는 바로 '원칙'이자 '대응하는 자신'이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실수하더라도 그것이 치명적인 실패로 확대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감정에 엉킨 군중은 결코 보지 못하는 추세와 흐름을 믿고 승부구를 던질 수 있다.
실수는 피할 수 없는 투자의 호흡이다. 실수가 실패로 확대되지 않게 막아줄 '원칙'이라는 포수를 믿어라. 뒤를 지켜주는 대응이 확실할 때, 비로소 시장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승부구를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신의 삶을 덮치지 않도록 단단히 막아줄 ‘대응의 포수’를 내면에 세우는 일이다.
손실은 마음속 거울을 흐려놓는다. 흐려진 거울로는 사물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고, 판단력을 상실한 채 내딛는 걸음은 결코 순조로울 수 없다.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인간은 초조해지고, 그 초조함은 개미지옥의 늪으로 끌어당긴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자신을 비워내는 것뿐이다. 탐욕과 집착을 비워내야만 비로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나를 둘러싼 시장의 진정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살아있는 동안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부끄럽지 않도록 치열하게 살아내는 데 있다. 쓰디쓴 실패의 고배를 마시며 많은 것을 흘려보내 버린 체험들은 시장의 귀중한 가르침이다. 재기 불능의 공포를 겪으며 지급한 그 비싼 수업료야말로 깨어 있는 투자자로 거듭나게 하는 시장이 새겨준 문신이다.
실패를 모르는 것만큼 큰 재앙은 없다. 손실로 인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어둠 속에 있다면, 본질에 집중하라는 시장의 명령이다. 시련을 긍지로 바꾸는 자만이 다시 일어설 자격을 얻는다.
혼마 무네히사와 스님의 대화는 시세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준엄하게 묻는다.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꽃잎이 스스로 떨어지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오직 그것을 바라보는 그대의 마음이다.
깃발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깃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람은 깃발을 움직일 수 없다. 바람이 부는 사건과 깃발이 존재하는 실체가 동시에 일어날 때 비로소 움직임이 발생하지만, 그 움직임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시세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가격(깃발)과 재료(바람), 그리고 투자자가 삼위일체로 맞물릴 때 비로소 하나의 시세가 탄생한다. 그러므로 투자자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고집과 편견을 완전히 비워내는 것이다. 마음을 비워 시세와 한 몸이 되어야 시세의 실체와 마주한다.
바라보는 마음이 곧 마주하는 시세다. 시세는 가격과 재료, 그리고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비워야 시세의 실체가 보인다.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확실한 투자법은, 바닥이 아닌 바닥권에 사고 천장이 아닌 천장권에서 파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므로 활황이 시작되는 신호 역시 반복되기 마련이며 나는 그것을 시세의 습성이라 부른다. 바닥권이라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사고, 천장권이라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판다. 횡보장이라는 판단이 서면 투자를 유보해야 한다.”
<혼마 무네히사, 거래의 신>
상수는 완벽한 바닥과 천장을 맞추려 드는 오만을 버린다. 대신 바닥권이라 판단되면 과감히 사고, 천장권에 도달했다 판단되면 미련 없이 판다. 그 사이의 횡보장은 인내의 영역이다. 횡보장에서 작은 이익을 탐하며 이랬다저랬다 매매하는 자들은 결국 장기적으로 적자의 늪에 빠지게 된다. 횡보장에서 거둔 푼돈은 큰 추세에서 발생하는 손실 한 번에 모두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 횡보장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않는 법이다.
상수의 투자는 대단히 제한적이며 단호할 수밖에 없다. 눈앞의 소폭 등락에 경거망동하는 것은 초보자의 전형일 뿐이다. 상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격의 소폭 등락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시세의 큰 흐름만 주시한다. 바닥에 가까울 때 사고, 천장에 가까울 때 판다는 관점을 유지한다. 그들은 ‘쉬는 것 또한 투자’라는 명제를 몸소 실천하며, 절호의 타점이 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린다.
횡보장에 익숙해지면 시세가 도약할 때 도태한다. 바닥과 천장을 맞추려 하지 말고 '권역'에 대응하라. 횡보장의 푼돈은 추세의 독이다. 푼돈을 탐하다가 정작 찾아온 대세의 파도를 놓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꺼이 지루함을 선택하여 감각을 예리하게 보존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사랑을 하는 것이 천국의 약간 맛보는 일이라면, 투자자가 된다는 것은 지옥을 약간 경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서늘한 진실을 간과한 채 시장에 들어서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애써 외면하곤 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가능성이란 단어는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그 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시장에서의 성공은 거듭되는 실수를 슬기롭게 다스리고, 숱한 실패를 단단한 주춧돌로 삼을 때에만 그 위에 바로 설 수 있다.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듯, 군중이 모인 곳에는 얻을 것이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와 모두가 뛰어드는 중간 진입은 얻을 이익보다 위험이 훨씬 크기에 경계해야 한다. 시장 환경은 ‘나빴다 좋았다’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할 뿐이다. 그 변화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즐기거나 묵묵히 견뎌내는 것, 그것이 투자이자 곧 인생이다.
원칙 안에서 손실은 내면에 뿌려지는 거름이다. 소문난 잔치에서 과감히 발길을 돌린 채 환경의 변화를 관조해야 한다. 인생도 투자도, 결국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단단함이 결정짓는 법이다.
남녀가 몸을 섞는다는 것은 가식과 치장이라는 옷을 벗어 던졌기에 그나마 진실에 가깝고 믿을만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계급 사회에서 돈의 위치는 그 몸의 본질과 닮아있다. 불행을 멀리하고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며 삶을 지탱하려면, 화려한 말이나 신묘한 기법보다는 정직한 몸과 돈을 믿어야 한다. 말은 언제든 화려하게 포장될 수 있지만, 극심한 치통 앞에 모든 생각이 무의미해지듯 몸은 그나마 진실에 가깝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삶의 다음 단계가 의미를 갖듯, 시장의 칼날에 베여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정직한 수중의 돈을 믿어야 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잃지 않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잃지 않는 것은 곧 삶을 살아가는 몸의 건강을 지키는 확률을 높이는 일과 같다. 투자에 있어 말은 허상일 뿐이며, 한순간의 수익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곁을 지키는 실체적인 돈이 배신하지 않는 유일한 진실이다.
옷을 다 벗었을 때 남는 것은 오직 몸과 돈뿐이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아지듯, 돈을 잃으면 논리와 철학도 무너져 내린다. 자본주의에서 돈을 지키는 것은 몸의 건강을 지키는 일과 같다.
모든 행위가 확률로만 존재하는 시장에서, 애매하고 어려운 자리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찾아 헤매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해답은 복잡함이 아닌 단순함에 있다. 개미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인 ‘기다림’과 ‘보냄’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하기만 해도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매매는 한결 쉬워진다. 걸을 때 팔이 자연스럽게 흔들리듯, 이 ‘융통성’이 몸에 배면 자름과 챙김이라는 또 다른 특권, 즉 ‘효용성(치고 빠지기)’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투자는 시장과 주고받는 정직한 거래다. ‘요만큼’의 작은 손실을 기꺼이 양보해야만, ‘저만큼’의 큰 이익을 취할 수 있다. 항상 절의 규칙처럼 주고받으며 누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쉽게 먹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마음고생할 수도 있고, 이익이 올 때가 있으면 손실이 올 때도 있는 법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장의 마음이 곧 시세의 본질임을 인정해야 한다. 등락하는 파동에 맞춰 원칙을 다듬고, 그 원칙을 반복한다면 나쁜 습관은 떠나가고, 그 빈자리에 성공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것이다.
작은 손실로 양보하는 것은 최고의 수비다. 작은 손실을 시장에 기꺼이 내어줄 때, 시장은 큰 이익으로 화답한다. 개미의 무기는 가벼운 몸놀림, 즉 융통성이다. 쉬운 자리까지 기다렸다가 치고빠져야 효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잘 예측할 수 없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척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과거 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투자자가 빠지기 쉬운 세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경고한다.
첫째는 자신의 감정을 과신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평온할 때 자신의 위험 감수 의지를 과대평가하지만, 막상 공포가 닥치면 논리는 힘을 잃고 감정이 의사결정의 주인이 된다. 둘째는 변동성을 이례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시장이 때때로 하락하는 것은 어느 날이 다른 날보다 더 추운 이치와 같아서, 변동성 그 자체가 시장의 본질이자 장기 상승의 동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에 적응하지 못하면 과도한 분석과 불안에 휩싸여 결국 그릇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셋째는 주식시장의 앞날을 감히 예측하려 덤비는 것이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척하며 예측으로 안도감을 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측은 과신이고 대응은 겸손이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때 "왜?"라고 묻는 것은 "겨울은 왜 추운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추우면 옷을 껴입어야 하듯, 변동성이 커지면 원칙이라는 방한복을 입고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시장의 변동성을 날씨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 예측에 쉽게 확신을 두지는 못할 것이다.
훌륭한 타자는 자기 존(Zone)에 들어오는 공을 기다릴 줄 알고, 유인구를 골라낼 줄 아는 인내심을 가진 자다. 그는 공을 세워 놓고 때릴 수 있을 만큼 자신만의 스윙을 완성한 사람이다. 투자자 또한 마찬가지다. 감정에 휘둘려 섣불리 배트를 휘두르지 않음으로써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볼카운트를 유지해야 한다. 데이터가 증명하는 유리한 방향으로 공이 들어올 때만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 결과가 안타일지 아웃일지는 행운과 우연의 몫으로 남겨두고, 전력 질주하고 커버-플레이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은 투자자에게 수익보다 ‘잃지 않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투수가 실점을 막지 못하면 승리하기 어렵듯, 자본을 지키지 못하는 투자자는 성공의 경험을 쌓아갈 수 없다. 또한 “파울 홈런 이후에 좋은 타구는 나오지 않는다”라는 야구계의 속설처럼, 한 방의 짜릿한 기억에 사로잡히거나 원칙을 어기고 얻은 요행은 치명적인 독이다.
투자는 나쁜 공을 골라내는 선구안 싸움이다. 실점을 막지 못하는 투수는 승리할 수 없듯, 자본을 지키지 못하는 투자자는 생존할 수 없다. 나쁜 공에 방망이를 내지 않는 것, 즉 원칙에 없는 자리에 진입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유리한 볼카운트를 점령한 것이다.
“추는 결코 한 방향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승세가 영원할 것이라 믿는 것은 시장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피터 번스타인의 경고처럼 시장의 추는 쉼 없이 양극단을 오가며 흔들린다. 이 요동치는 현장 속에서 투자자는 결코 텅 빈 캔버스에 자신만의 화려한 환상을 그려내는 화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투자는 무언가를 새로이 빚어내는 창작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 시장이 그려놓은 거대한 흐름을 한 박자 늦게, 그러나 정확하게 뒤따라가는 고독한 여행이다. 내 머릿속의 생각으로 시장의 그림을 억지로 뜯어고치려 들면 투자자의 비극은 서막을 올린다.
투자자에게 기다림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인내를 의미하며, 대응은 시세가 만들어 내는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용기를 의미한다. 투자의 시작(알파)이 시간의 리듬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 완성(오메가)은 시장이 열어준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결국 투자자란 시장이 그려가는 흐름 뒤를 묵묵히 뒤따르며, 자신만을 유일한 벗 삼아 걷는 고독한 여행가여야 한다.
투자는 화가의 창작이 아니라 여행가의 순응이다. 지나온 흐름 곳곳에는 예측이 그렸던 허망한 신기루들이 널려 있다. 시간의 리듬을 견디고 시장이 열어준 공간을 찾아가는 용기가 투자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예측의 신기루를 버리고 흐름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자만이 오아시스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