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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은 실력 너머에 있다.

by 황금지기

행운은 실력과 동일 선상에서 작용하기에 행운은 실력 너머에 있다. 꼬리가 전체를 좌우하는 게 투자 시장의 일반 법칙이지만, 쭉쭉 뻗어나가는 추세의 확률은 낮다는 게 파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파동은 등락한다는 건 파동을 그려가는 이유이자 손해볼 게 없는 관점이며,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시장의 황금률이다. 거대한 시장이란 톱니바퀴에 맞물린 작은 톱니바퀴여야 하고, 주관이 폐허 위에서 객관적으로 원칙을 지켜가는 건 필연의 시간을 이해했다는 것이며, 그 버티는 시간이 시장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나마 기술적 분석으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법에서 절대성을 찾거나 자신의 똑똑함에 기반한 우월성에 기대는 건 미친 짓에 불과하다. 감정의 개입 여지를 없앨수록 기계적으로 되고, 주관이 폐허가 되어야 완벽하게 기계적으로 된다.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 없다면, 주관의 여지가 존재하는 만큼 불안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세상사 행운이 50%이고 실력이 50%로 보면 편하고, 행운은 실력과 동일 선상에 작용하기에 행운은 실력 너머에 있다. 즉 실력이 바탕이 되어야 행운이 제대로 작동하는 법이다. 운이 50%임을 내면으로 인정하게 되면, 이것을 받아들이면 신기하게도 정체성이 변하게 되고,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겸손해지면서 자의식이 해체되면서 소수가 되고 그렇게 성공 방정식이 완성된다.




20%에 해당하는 소수의 종목에서 전체 투자 수익의 80%를 얻고, 반면에 80%에 해당하는 종목에서는 전체 투자 수익의 20%만을 얻는다. 어떻게 투자해야 하나? 5종목 정도로 분산 투자하고, 그중에서 수익이 난 종목의 경우는 추세가 꺾일 때까지 지속해서 보유해야 한다. 상승 추세가 진행 중인데 서둘러서 매도해 버리면 큰 이익을 얻지 못한다. 주식투자에서 큰돈을 번 사람들 대부분은 소수의 종목에서 대박이 났다. 투자하는 종목 모두에서 수익률이 높았던 것은 아니다. 피터 린치 역시도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꽃을 꺾고 잡초에 물을 주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라”라고 조언했다.

<부의 인문학>

손실을 짧게 자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자 워런 버핏의 절대 원칙인 돈을 잃지 않는 법이고, 이익을 길게 가져가야만 부를 쌓아갈 수 있다. 꼬리가 전체를 좌우하는 게 투자 시장의 일반 법칙이다.




(이익확률 × 예상이익) – (손실 확률 × 예상 손실) = 기댓값이다. 오를 가능성이 내릴 가능성보다도 더 큰데도 불구하고 투자하면 안 되는 경우는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가? X 종목(상승 확률 70%, 하락 확률 30%)이 그동안 주가가 많이 올라서 천장 근처에 도달했을 때 현재 시점에서 주가가 더 오를 확률은 높지만, 예상 추가 상승 폭이 작고 한편으로는 주가가 내릴 가능성은 작지만 만약에 주가가 내린다면 큰 폭으로 내릴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는 X 종목에 투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엔 X 종목의 기댓값이 손실로 나타나게 된다.

<부의 인문학>

투자자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고점 매수와 저점 매도해야 함과 동시에 무슨 일이 있어도 추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파동은 등락한다는 관점에서는 시각적으로 보이면 이미 늦었다는 걸 의미하며, 곧바로 ’쭉쭉‘ 뻗어나가는 추세의 확률은 낮다는 게 파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완두콩의 크기가 평균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주식시장에도 평균에 회귀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주가가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파는 즉 평균으로의 회귀에 베팅하여 큰돈을 번 투자자들이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 워런 버핏 같은 가치투자자들이 그런 경우다. 때때로 아주 오랫동안 주가가 회복하지 않는 때도 있다. 또 때때로 평균은 새로운 평균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부의 인문학>

마침내 깨친 ’파동은 등락한다‘라는 관점이 타당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파동은 추세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구간에서 좁게 횡보하거나 크게 등락한다. 파동은 등락한다는 건 파동을 그려야만 하는 이유이자 손해볼 게 없는 관점이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고, 시장에는 기본적인 자질로 요구하지만,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섭고도 무시무시한 절의 규칙 즉 손절과 익절이 있다.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모든 투자 대가가 인정하는 절대 규칙이자 시장의 황금률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받아들일 수 없을뿐더러 곳간이 비어 돈이 없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게 손절인데 그것을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그 너머에 또다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줬다가 뺏는‘ 시장의 끝없는 조롱인 익절이라는 절대 규칙도 있으니, 투자는 두말할 필요 없이 어렵다 할 만하다.




시장의 톱니바퀴에 맞물리고 싶은 작은 동그라미의 희망이랄까! 위인전도 그 속을 세세히 살펴보면 잘잘못이 모두 존재한다. 모든 것은 다만 흘러갈 뿐이다(Everything just goes by). 단지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하려 드는 자에게 시장은 가혹하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비참할 정도로 가혹하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1원짜리일 뿐인 인간에게 세상은 그저 각자의 작은 동그라미 하나일 뿐이다. 다수가 그렇지 못하기에 비록 1원짜리 작은 동그라미지만 자그마한 세상 이치를 알고 세상사 작은 톱니바퀴가 되면 부를 이루게 된다. 이게 작은 동그라미의 희망이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주관을 버리고 거대한 시장이란 톱니바퀴에 맞물린 작은 톱니바퀴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꽃은 투자이고, 투자의 이치를 깨쳤다면 그는 부를 일굴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한다. ‘정답은 없고, 끊임없이 등락하면서 우상향한다.’ 이게 자본주의에서 오롯이 옳은 명제다. 각자의 주관은 던져지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맞추겠다는 시도와 무엇이 다른가? 투자자가 가야 할 길은 시간을 이해하고 시간을 X축에 놓은 반복에서 길을 찾아가는 무한한 시도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명쾌한 답은 반복하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자신을 만든다”라는 말처럼 “처음에는 자신이 누적 수익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누적 수익이 자신감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습관이 되어 기다리고·맡기고·반복하는 그 마음이 소설가가 서정주의를 버린 이후에 진정한 작가로서의 자신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의 개종과도 같은, 주관에서 객관으로의 개종이다. 편향 덩어리인 인간의 본성,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의 기존 사고의 틀과 신념을 망치로 깨부수는 개종이다. 주관이 폐허가 되어야만 남는 게 바로 객관이다. 시장에서 주관이 꿈꾸는 모든 것은 단언컨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고 단지 신기루일 뿐이기에 반드시 주관이란 커튼을 열어젖히고 객관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




작은 손실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에 작은 수익에도 연연하지 않는 마음이 더해져야 하기에, 기다리고·맡기고·반복하는 그 마음으로 장기 투자해야 하기에, 지독한 지루함을 견디면서 깨달음의 비탈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올라야 하기에, 느리지만 느낌이 참 좋은 여유롭고 덤덤한 그 길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기에, 도박적 사고에서 확률적 사고로의 개종이 부를 쌓는 과정이기에 투자는 어렵고도 어렵다. 인간이란! 좋았던 걸 강하게 기억하고, 머릿속에 맴돌았던 걸 오래 기억하는 편향과 복기할 때도 원하는 의중과 일치하는 것들이 각인되면서 마치 ‘다음에 이렇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미래에도 이렇게 될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확률 게임은 일정한 틀을 (원칙이란 이름으로) 반복하되, 매번의 사건은 개별의 확률을 지닌다는 사실을 절대 망각해서는 안 된다. ‘틀을 지키되,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속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비로소 온몸으로 깨쳐야 하고, 행운과 우연의 점철, 위험과 실수의 여지가 영원히 공존하기에 소양을 지속해서 쌓아가야 한다.




진시황 때 중국 인구는 5,000만, 삼국지 당시 중국 인구는 1,000만, 위가 8개 주 500만, 오가 4개 주 300만, 촉이 1개 주 200만이었다. 이렇게 전쟁은 무서운 것이다. 촉나라 제갈량의 공격에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았던 위나라의 사마의가 방어만 한 것도, 제갈량이 몇 번의 출사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비옥한 영토는 모두 위나라 땅이었기에 시간은 위나라 편이었기 때문이다. 위나라로서는 한세대만 지나면 무조건 이기는 전쟁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시간에 대한 이해, 내공의 깊이다. 제갈량도, 사마의도 위대하게 시간을 이해했다. 원칙을 세우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마음이 비옥해지는 필연의 시간을 이해한 자가 시장을 이해한 자다.



내 안에서도, 시장에서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고, 사람은 고쳐 쓰는 법이 아니며, 한번 아니면 영원히 아니다. 어제를 복기하면 신기하게도 내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과 미련으로 집착하지만, 인간사 지불시도(智不是道)다. 암 환자에게 병은 완치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 여김이 현명하듯이, 시장 참여자에게 지극히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불치병인 뇌동의 본성도 숙명으로 여기고 다독이면서 함께 가야 할 내 안의 동반자로 인정함이 옳다. 극복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체계적 훈련을 통한 몇 가지 안전장치가 전부다. 인간의 본성은 극복의 대상이기보다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줄어가야만 하는 노력이 대상이다. 모든 문제는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있는 치명적 구조로 인해 뇌동하는 자기 탓이다. 시장에는 언제나 블랙스완이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듯이 인간의 본성에도 블랙스완이 늘 도사리고 있다. 투자라는 게임판은 당장 수익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잃지 않으면서 버티는 게임이다. 버텨서 살아남는 자가 크게 (거의 전부를) 가지는 게임이다. 기대치를 낮추면서 원칙을 지켜가는 그 버티는 시간이 시장을 이해하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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