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투자자가 인간 본성의 기본값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응의 예술이라는 대전제가 아직 심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굴레를 딛고 선순환 구조로 갈 수 있는 단단한 방법은 오직 하나, 유리한 방향으로 근거 있는 진입만 하는 습관이라는 단단한 도미노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진화의 지배 아래 미래를 깎아내리고 돈에 대해 서툴게 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본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을 빌려 건전한 습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선순환의 첩경이다.
「The One Thing」은 우리에게 권고한다. “경주마처럼 옆을 볼 수 없게 눈을 가리고, 인생에서 복잡한 다른 것들을 싹 정리하라. 일단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린다면, 그 뒤로 줄줄이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도미노나 혹은 이미 쓰러져 있는 긴 도미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잦은 진입이 필연적으로 심리적 흔들림을 부르는 횡보장을 어떻게 다스릴지 고민해야 할 시점에, 여전히 진입 후의 손실을 걱정하거나 막연한 수익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아직 더 한참 더 깨져야 한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연어의 몫이며, 결국 연어는 그 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어에게는 종족 번식이라는 대의가 있을지 모르나, 흐름을 거스르는 투자자에게 그것은 그저 피할 수 있었던 비참한 참사일 뿐이다.
흐름은 온전히 몸을 싣고 타는 것이다. 연어처럼 강물을 거스르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투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유혹의 곁눈질을 차단하고 '단 하나의 원칙'이라는 첫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그것뿐이다.
“성공에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 이번의 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다음 순간에 무엇을 경험하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도하게 낙관적이고 자신 능력에 대해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결과에 수반되는 과정을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를 범한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계획의 오류’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로 과정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게리 켈러, 제이 파파산, The One Thing>
“나는 그저 보잘것없는 도박꾼일 뿐이었다.” 이 서늘한 자각이 찾아왔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적 소양이 미천했음을,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나만의 좁은 세계에 갇혀 미성숙한 상태로 시장을 대했음을 비로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나 또한 서정적 태도라는 껍데기를 깨뜨리지 못한 채, 독선과 아집으로 뭉친 탐욕의 늪에서 복잡함에 갇혀 있었음을 눈치챘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다음 운명을 결정한다. 근거 없이 속삭이는 “이번에는 다를 거야”라는 낙관론은 성장을 가로막는 견고한 감옥의 벽일 뿐이다. 근거 없는 낙관과 계획의 오류를 버리고, 자신의 미성숙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투자의 부활은 시작된다.
추세와 등락, 그리고 횡보가 마음속에서 실타래처럼 엉킨 상태에서 내뱉는 ‘파동은 등락한다’라는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터무니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 의지력을 스스로 쓰레기통에 처박았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뇌동과 추격으로 숱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시장 구조를 냉철하게 읽지 못한 전략적 실패 앞에 전술은 무용지물이었으며, 실전은 그저 탐욕이라는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에 불과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자신만의 축제 속에 나이 들었고, 이제야 시장 곳곳에 널린 처절한 욕망의 시체들을 밟으며 자기 성찰과 극복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다.
인간의 의지력 또한 파동과 같아서 수렴해야 발산할 수 있고, 발산한 뒤에는 반드시 수렴의 휴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심리적 흔들림과 손실 확률이 적은 구간에서 스스로 검증한 원칙을 지키며, 최소한의 의지만으로도 작동하는 습관(66일의 법칙)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 부의 확장은 그 단단한 토대 위에서의 결과물이다. 「아주 작은 반복의 힘」과 「The One Thing」, 그리고 「Leverage」의 법칙에 따라 건강과 일상, 돈과 심리의 균형을 맞추어 가야 한다.
매매의 승패는 기술이 아니라 투자자의 ‘상태’에서 이미 결정된다. 의지는 깊은 숙면과 건강한 육체에서 충전되며, 선순환하는 마음의 궤적 또한 건강한 육체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난다. 전략 없는 전술은 패배의 지름길이며, 준비 없는 실전은 탐욕의 불꽃일 뿐이다.
어쩌면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욕망, 찰나에 갈라지는 생각들, 수시로 흐름을 바꾸는 지껄임 앞에서 의지와 노력을 다해 발버둥 치는 것과 서정적 태도를 완전히 벗어던지는 일은 평행선에 놓인 별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투의 과정을 거치며 투자와 삶을 정직하게 진단했고, 살아가는 동안 견지해야 할 분명한 태도를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비상한 것이다.
비록 불쑥 화를 내고, 고집스러운 언쟁을 벌이고,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 후회하고 다시 다짐하는 인간 필연의 굴레를 반복하겠지만, 이제 의지가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알고 자신을 돕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할 자격이 있다. 방금 솟아올랐던 생각조차 딴생각에 팔리면 금세 흩어져 버리기에 집착하듯 적어두지만, 그렇게 기록된 글조차 다시 읽는 순간에만 잠시 살아날 뿐인 게 인생이다. 한 번 더 봄을 맞이하며 세상의 이치를 수동적으로 알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며 앎에 다가서고, 무지를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강함의 씨앗으로 키워가는 과정이야말로 지극히 인간다움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지를 가르쳐준다. 신의 무지와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투자의 진정한 시작이다. 자신의 약함을 딛고 일어서려는 정직한 의지가 진정한 투자자로 완성할 것이다.
투자자가 무너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각종 편향에 눈이 멀어 자신이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전의 문턱을 넘어서면 원칙은 허망하게 뒷방으로 밀려난다.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휩쓸린 좌뇌에서 쏟아지는 자책과 후회의 비명, 그리고 시장의 끝없는 조롱을 견뎌내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구석에 웅크려 뼈저린 후회를 곱씹을 때 쏟아지는 그 비정한 야유를, 고도로 훈련된 내공 없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기억하라. 그 고통스러운 조롱이야말로 감당해야 할 진짜 수수료이며, 살아남은 자의 실력이자, 다음 베팅을 이어갈 수 있는 소중한 밑돈이다. 철저한 자기 검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의지는 추풍낙엽처럼 황량한 시장의 거리를 뒹굴게 될 뿐이다. 치열한 철저함이 경험이라는 충분한 시간과 만나, 투자하는 마음이 자기 확신으로 변하는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야만 진정한 투자자의 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다. 여기에 인문학적 소양을 더해 자만이 스며들 틈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
제시 리버모어는 경고했다. “똑똑한 이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이유는 모두 자만 때문이다. 자만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돈을 지급해도 아깝지 않다. 그것은 어디에 있든지 누구든 감염될 수 있는, 참으로 돈이 많이 드는 병이다.”
시장의 조롱을 견디는 힘이 곧 실력이다. 분모인 자만을 깎아내고 분자인 실력을 채워가야만 시장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젊은 날의 초상은 하늘이 부르는 장단에 춤추며 부서지는 빗줄기 속에 서 있는 고독한 자화상이었다. "나로 인해 세상은 세상이다"라고 외쳐보지만, 삶은 언제나 기다란 정체의 늪이었고 의식은 희뿌연 연기 속 고독의 창살 아래서 잠들곤 했다. 일렁이는 외로움에 부딪히는 술잔 너머로 막다른 응시를 던지며, 비탈진 밭고랑에 이상의 씨앗을 심고 성스러운 노동의 은총으로 꽃을 피우는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정작 세상 밖에서 기다린 것은 숨쉬기 위함이었다. 내 떠나도 그대로 남을 세상이라면, 그날까지 아침 안에서 영롱한 이슬을 키우는 사철 푸른 잎새로 살고 싶을 뿐이다.
이토록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끝내 바로잡으며 내적 탐구를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제 길을 걸어가는 톨스토이의 ‘레빈’과 ‘네흘류도프’. 이 두 사람이야말로 투자자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인간상이 아닐까?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밀란 쿤데라의 통찰을 빌려온다면, 인간 본성의 굴레에 갇힌 투자자에게는 "나는 흔들린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고백이 정직할 것이다. 이 어찌할 수 없는 흔들림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선인들은 지혜로운 방책을 일러주었다. 그 흔들림의 파동에 휩쓸리지 않도록 매매 횟수를 최소화하고, 수익의 평가 빈도를 줄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고 말이다.
흔들림은 살아있다는 생존의 증거다. 다만 그 흔들림이 뇌동의 도화선이 죄지 않도록 흔들림을 알아차리고 고요히 이슬을 머금은 사철 푸른 잎새이어야 한다.
심중(心中)에서 꿈틀대는 분노의 일렁임에 이제는 화답하려 한다. 인내라 믿었고 의지라 믿어왔던, 그러나 심연 속에 잠들어 있던 그대를 깨우기 위해 마음 한가운데에 서슬 퍼런 도끼를 꽂는다. 황량한 대지를 무력하게 바라보기엔 가슴이 너무 미어지고, 형태 없는 외로움에 분열되는 의식을 방치하기엔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아니 되겠다. 생의 절반을 살았으나 남은 것이 한 줌의 허무와 우수의 빗줄기뿐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백지 위에 처음부터 다시 인생을 수놓으려 한다. 다만 그 삶이, 오직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자의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며 해야 할 일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온전히 내 것으로 체화하는(Ctrl+C, Ctrl+V) 과정이다. 하지만 마음에 독선과 아집이 권력을 쥐고 있으면, 제멋대로 잘라내고 수정하는(Ctrl+X)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렇게 난도질당한 지식은 점차 회색빛으로 변해가다 결국 기억 저편으로 영영 삭제되는(Ctrl+E) 쓸모없는 파편이 되고 만다.
지혜는 편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남은 지식은 그저 ‘아는 척’하는 자만의 도구로 전락하며, 스스로 쓸모없는 것에 취해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헛똑똑이’의 삶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투자에서도, 관계에서도, 그리고 글에서도 자신을 떼어내야만 한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서정적 태도의 껍질을 벗어던질 때, 작지만 단단한 습관은 비로소 싹을 틔우고 알을 깨며 또 다른 세계로 비상하게 된다. 어느덧 성인이 된 딸아이가 던진 한마디—"아빠는 결국 아빠 의견대로만 하잖아"—는 나의 폐부를 찔렀다. 많이 알고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 내 의견만 고수해 왔던 어설픈 앎은 투자에서도, 삶에서도 늘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투자의 답은 본성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돌이켜보면 그간의 세월은 확증 편향과 맥락 의존적 기억에 충실했던, 오직 동기에 의한 추론의 시간이었다. 닫힌 사고와 아집에 갇혀 사람에게서도 책에서도 진정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
꼬리가 전체를 좌우하고 2할이 8할을 움직이듯, 단 하나의 올바른 습관은 등비수열의 도미노가 되어 삶을 바꾼다. 열 가지 일 중 다른 모든 노력을 불필요하게 만들 단 한 가지에 집중하라. 아집과 독선은 나만의 세계라는 감옥에 갇혀 홀로 선량함의 탈춤을 추는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비판했듯, 도덕적 대의를 명분 삼아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인간이 되어버린 위선적인 혁명가의 길을 경계해야 한다.
나를 떼어내고 본성을 다스리는 습관이 최우선이다. 내 의견이 맞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투자자가 경계해야 할 가장 강력하고도 치명적인 적이다.
「돈의 시나리오」에서는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고 부를 이룬 사람을 3%라고 했다. 선물 시장에서는 이 수치가 단지 0.3%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000명 중 단 3명만이 성공한다는 이 수치는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관점을 바꾸어 우리 인구 5,000만 명을 대입하면 무려 15만 명이나 성공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가 된다. 물론 그 길이 지독하게 어려운 고행의 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투자는 본질적으로 심리 게임이며,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깨부수는 깨달음의 과정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체계적인 훈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흔들리는 인간을 지탱해 줄 인문학적 소양이다.
시장에서 보통의 노력은 대개 실패로 귀결되며, 노력의 총량이나 기간이 성공과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기법을 정립하는 것은 그저 기본일 뿐, 치열한 자기 검증을 거쳐 그 기법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실수의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신념화된 원칙이 기계적으로 수익을 쌓아가게 하라. 또한 ‘쓰지 않아도 되는 여유 자금’이라는 토대가 있어야만 비로소 원칙을 여유 있게 지켜낼 수 있다.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자만은 전설적인 투자자마저 파멸로 이끌었다.
수익은 투자하는 마음속 화학반응의 결과다. 노력한 만큼 수익이 나오지 않는다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성공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깨우침의 과정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에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이 고백은 투자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지난 실패를 지탱하던 또 다른 축은 자본주의 시장과 나 사이의 지독한 ‘인지부조화’였다. 역사적으로 강세장은 약세장보다 길었고 수익률은 늘 손실률을 압도해 왔다. 자본주의가 기술의 진보와 함께 우상향해 왔음을 알기에 그 방향에 베팅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임을 이성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본성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하락의 방향을 응시할 때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낡은 가치관에서 기인한 그 익숙한 파멸의 예감은 참으로 떨쳐내기 어려운 족쇄였다.
내게 밤은 세이렌과의 동침이었다. 어둠이 내리면 의지는 생기를 잃었고, 하루의 의지력이 수명을 다한 틈을 타 인간 본성의 기본값인 욕망은 하이에나의 눈빛을 한 채 어슬렁거렸다.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난 확신은 들불처럼 번지며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자에게 어둠은 이토록 치명적이다. 의지는 잠들고 욕망의 육체만 남은 밤,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사악한 정령들이 찾아온다. 밤이 깊어질수록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보다 강렬하게 일렁이는 시장의 변동성은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되어 나를 유혹했다.
이성은 우상향을 알지만, 본성은 익숙함에 안주하려 한다. 밤의 변동성은 독이 든 성배다. 의지력이 고갈된 시간에 마주하는 시장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아니다. 밤은 의지력을 충전하고 감각을 북돋우는 정신적·육체적 낙원이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