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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이해한 자가 시장을 이해한다.

by 황금지기

수수료나 적은 손실에 연연해하지 말고 기준으로 정한 선에서 진퇴를 반복하는 생존적이고 복리적인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데이트레이딩 관점에서 장기투자는 일관성 있는 원칙의 반복이고, 실력은 원칙의 반복으로 쌓여가는 시드다. 예측의 대상이 아니며, 이길 수 없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인덱스펀드에 장기투자 하는 건 손해 볼 것 없는 선택지다. 원칙으로 정한 선이 주인이고, 주가는 그 선에 묶인 개에 불과하다. 복은 반복하는 자를 위해 하늘이 준비한 선물이다. 복을 반으로 쪼개면 반복이 된다.




복리의 그 시간을 이해한 자가 시장을 이해한 자다. 시장은 확률 게임판이기에 수학적·확률적 사고가 토대가 되어야 하고, 수익은 시간이 만드는 게임판이기에 생존적·복리적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근거 있는 진입만 해야 하고, 확률 게임에 따라 ‘아님’에 대응해야 하기에 어렵고 다수가 물레방아처럼 제자리에서 쳇바퀴를 돌고만 있는 것이다. 처음의 ‘최대의 일과 최소의 결과’라는 지루함을 이기면서 원칙을 지키고 있다면, 파산하지만 않는다면 생존하는 자가 전체를 가진다. 언제든지 아닐 수 있다. ‘아님’에 반응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실력의 증명이다.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실수의 여지를 줄이면서 복리의 나날들을 그 하루하루를 꼭꼭 씹으면서 사는 삶이어야 한다. 투자자에겐 하루하루가 복리의 나날들이어야 한다. 모든 확률 게임은 시간을 이해하는 베팅의 기술로 승부가 결정된다. 확률은 시간 게임을 의미하고 복리는 시간이 주는 보상이다. 올바른 나이 듦에 대한 보상이다.




수수료나 적은 손실에 연연해하지 말고 기준으로 정한 선에서 진퇴를 반복해야 한다. 원칙으로 정한 선을 중심으로 신호가 나오지 않으면 ‘보내고, 기다리면서’, 신호가 나오면 ‘치고, 빠지면서’ 그렇게 등락해야 한다. 바둑에서도 고만고만한 사람과 둘 때는 생각나는 대로 두어도 고만고만하지만, 바둑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정석을 제대로 배우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투자도 매한가지다. 감정대로 진입과 청산을 반복해서 일시적인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체계적인 훈련과 실전에서의 기다림, 아닐 때 대응이라는 정석의 과정을 거쳐야만 포기하지 않고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닿을 수 있다.




워런 버핏도 그 어떤 투자 대가도 투자한 종목 중 열 중 넷은 형편없고 멍청하기까지 한 종목이지만, 그들은 투자 대가가 되었다. 몇 번이고 틀려도 상관이 없는 복리로 장기 투자했고, 숱하게 틀려도 결국에는 시장에 따라 우상향하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틀려도 상관없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 ‘맞추려고 하지 않고, 맞춰가려고 할 수 있느냐!’ 매번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맞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틀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이 영원히 복리로 우상향하기 위한 시장에서의 정답이다. 데이트레이딩 관점에서 장기투자는 일관성 있는 원칙의 반복이고, 실력은 원칙의 반복으로 쌓여가는 시드다.




욕망은 잠재된 힘이 있다는 증거다. 계발되었든 그렇지 않든,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곳에는 그것을 하려는 욕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뭔가를 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면 이는 그것을 해낼 능력이 충분히 있어서 단지 그 힘을 계발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작동하기만 하면 된다는 명백한 증거다. “첫째로 모든 걸 만들어내는 근본 물질인 지혜로운 원소가 존재함을 믿고, 둘째로 당신이 바라는 모든 걸 그 원소가 가져다준다고 믿은 후, 셋째로 깊이 감사하여 그 원소에 연결된다.”

<부의 비밀 – 윌리스 와틀스>




톨스토이의 <부활>을 통한 사색

① 네흘류도프의 삶에는 그 스스로 ‘영혼의 청소’라고 부르는 것이 이미 여러 차례 일어났다. 불현듯, 때로는 시간의 간극이 꽤 벌어진 후 내면생활의 지체나 심지어 정지를 자각하고 자기 마음에 쌓여 그 원인이 된 더러운 먼지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 나서는 정신 상태를 그는 영혼의 청소라고 불렀다. 그런 식으로 각성한 후에는 언제나 자신을 위한 원칙을 세워 그것을 평생 따르려고 했다. 일기를 썼고, 두 번 다시 바꾸고 싶지 않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즉 그가 자신에게 다짐한 표현대로라면 새로운 페이지를 넘긴 것이다. 그러나 매번 세상의 유혹이 그를 붙잡았고, 그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다시 타락해 종종 예전보다 더 심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② 그 간극이 어찌나 크고 자신이 어찌나 심하게 더럽혀졌는지 그는 처음으로 정화의 가능성에 대해 절망했다. ‘자기완성과 향상을 위해 이미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했잖아.’ 마음속에서 유혹의 목소리가 말했다. ‘한 번 더 시도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다들 그래. 그런 게 인생이야.’ 그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진실하고 유일하게 강력하고 유일하게 영원한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가 이미 네흘류도프 안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실제 모습과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 사이의 간극이 아무리 크더라도 눈을 뜬 정신적 존재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통한 사색

③ 가장 널리 퍼진 흔한 미신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저마다 자기만의 일정한 기질을 지녀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똑똑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열정적인 사람, 무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악하기보다 선할 때가 더 많고, 어리석기보다 총명할 때가 더 많고, 무심하기보다 열정적일 때가 더 많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 착하다거나 총명하다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악하다거나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언제나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강과 같다. 어디에 있든 물은 똑같이 변함없다. 그러나 어느 강이나 좁고 빨라졌다가 다시 넓어지기도 한다. 잔잔해지고, 깨끗해지고, 차가워지고, 탁해지고, 따뜻해진다. 인간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성질의 싹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가 때로는 이런 성질을, 때로는 저런 성질을 발현하며, 여전히 같은 사람이면서 종종 본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④ 문제 하나하나마다 너무도 많은 상념이 뒤따랐다. 지금 그는 그 문제들을 자신에게 던졌고, 모든 게 얼마나 단순한지 깜짝 놀랐다. 모든 게 단순해진 것은 지금 그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관심도 두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그 확고한 믿음이 그에게 기쁨을 주었다.




(위의 네흘류도프의 깨달음처럼) 사람의 마음이 강물과 같아서 이러할지인데 어찌 군중심리의 합인 파동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흔들리지 않고 피겠는가? 수시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파동과 조화를 찾아가면서 원칙이 싹을 틔우고 푸르른 나무로 우뚝 서는 것이었구나? 나아가다 보면 단순해지면서 믿음은 확고해지고 기쁨으로 전율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잘 살고 싶은 열망과 이기로 자본주의는 결국 우상향하므로 장기투자는 항상 답이다. 틀려도 상관없다. 이 명제가 틀리면 믿고 투자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불행해지기는 매한가지다. 손해 볼 것 없는 선택지는 살아가는 동안 기축통화가 바뀌기 전에는 (거대한 물결이 세상을 휩쓸기 전에는) 이 명제를 믿어보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 따라서 나 역시 내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머릿속의 한정된 모형을 가지고 세상을 설명한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 원리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필요를 충족시킨다’라는 말은 훌륭한 표현이다. 내가 통제권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계산하고 해결해야 할 분석적인 문제가 아니라, 누가 긁어주어야 할 정서적 가려움증 같은 것이다.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불확실하다는 현실보다 오히려 설득력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스토리에 집착한다. 세상이 당신 생각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는 탓도 있다. 정신적으로는 어떨까? 자산 가치의 30% 하락이 우리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과소평가하기 쉽다. 실수의 여지를 생각할 때 엄밀한 의미에서 ‘견딜 수 있는 것’과 ‘정서적으로 가능한 것’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기 쉽다.

<돈의 심리학>

주식시장은 예측의 대상이 아니며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인덱스펀드에 장기투자 하는 게 현명하다. 물론 큰 흐름을 보면서 언제 시작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말이다. 몇 번 아니 몇 해 시장을 잘 만나 우월한 이익을 거둘 수는 있겠지만, 크고 작은 붙임을 견디기란 절대 쉽지 않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이익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필연적으로 욕심을 부르게 되고, 그렇게 탐욕에 휘둘러 결국에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와 같아질 확률이 훨씬 높다. 무엇보다도 장기투자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더 여유로워지고 덤덤해지는 길이다. 데이트레이딩에서의 장기투자인 ‘검증된 원칙의 반복’ 역시 이것과 같아야 한다.




주식시장은 계속 상승할 수 없다. 단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주식시장은 가죽끈에 묶여 있는 미친개처럼 비합리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우리를 부자가 아닌 가난뱅이로 유혹하는 것이 바로 이 미친개의 움직임이다. 가죽끈에 묶인 개를 보면 돈내기하는 감정적인 도박꾼을 상상해 보라. 개가 주인보다 앞서서 뛰면 도박꾼은 개가 멀리 질주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질주하는 개에게 돈을 걸 것이다. 그러나 그 개는 가죽끈에 묶여 있어서 주인보다 훨씬 앞서 나갈 수는 없다. 가죽끈에 묶인 개가 앞서서 가면 주인은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인은 개를 따라잡을 것이다. 그들은 가죽끈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개가 뛰고 있으니까 그렇게 계속 광란의 뜀박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제넘은 확신을 하게 된다. 그들의 탐욕은 뇌를 짓누른다. 만약 그러한 두개골의 압박이 없다면 그들은 개가 가죽끈에 묶인 채로는 주인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주식의 쓸모 – 앤드류 할램>

주식시장에서 기업실적이 주인이고 주가는 그 주인의 끈에 묶인 산책하는 개에 불과하듯이, 원칙으로 정한 선이 주인이고, 주가는 그 선에 묶인 용맹한 개에 불과하다.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끈에 묶인 개에 불과하기에 주인과 한참 떨어져 있을 때, 즉 원칙으로 정한 선과 이격이 있을 때 절대 추격해서는 안 된다. 주인이 목줄을 당기면 그걸로 끝이다. 개가 주인 곁에 있을 때, 개와 주인의 움직임을 보고 진입하고 개가 다른 곳으로 가면 그냥 나와주고, 너무 멀리 달려가도 미련 없이 나와주면 그뿐이다.




하늘은 자신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반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복은 반복하는 자를 위해 하늘이 준비한 선물이다. 복을 반으로 쪼개면 반복이 된다. 복은 바라는 게 아니라 반복으로 자신이 자신을 도우면 주어지는 것이니 반복이 그만큼 중요하다. 결국 해내기 위해서는 원칙을 바로 세워 지키면서 반복하는 게 비밀이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기에 성공은 마라톤 경기가 아니라 단거리 경주와 같다고 여기면 마음이 그만큼 편하다. 단거리 경주의 합이, 힘과 쉼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마라톤처럼 이어진 결과가 성공이다. 그렇게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만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을 믿고 그렇게 자신을 훈련하면서 전력 질주해 보고 쉬다가 달리기를 반복해 보는 게다. 경험에 길을 묻고, 경험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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