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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지향점은 선량함이다.

by 황금지기


책을 읽는 건 선량해지기 위함이고, 선량함을 깨닫는 도구로 신이 만들어낸 판도라의 상자가 도박이다. 그냥 웃어버리지도, 선량하지도 못한 자에게 시장은 천형을 내릴 뿐이다. 선량함으로 건너가는 여정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솟구치는 욕망에 발걸음이 엉키면 그걸로 끝이니 시장에 맡기는 마음 그 선량함이 자질 중 으뜸이다. 신묘한 재주는 기묘한 착각에 불과하고 절묘한 개입은 절묘하게 망칠 확률과 같다. 투자의 쓸모는 선량함을 일깨우는 것, 업(業)이 되기 위한 조건은 지속 가능성, 선량함은 이것을 담보한다.




그냥 웃으면 세상이 달라진다. 화를 내는 게 뇌동이다. 뇌동은 투자자의 ‘선량함’을 망치는 도둑질이다. 투자가가 원칙이란 선을 넘으면 그게 도둑질이다. 그저 반복하는 너무나도 사소한 작은 변화가 전체를 바꾼다. ‘선량함(성품이 착하고 어질다는 뜻으로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금욕적 도덕주의가 아니다. 그런 사람이면 부를 탐하는 투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세상 이치를 깨닫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뜻한다. 남의 여자를 탐하지 않는 금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타인이나 흐름을 강제하지 않는 마음과 같다. 사람을 강제하지 않으면 어진 사람이고, 흘러가는 흐름에 집착하지 않으면 현명한 사람이다. 즉 탐욕과 아집을 비운만큼 채워지는 형질이다)’은 확률의 세계에서 필연의 공포와 끝없는 의심, 아쉬움과 끝없는 후회, 미련과 끝없는 조롱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스펀지다. 시장에서 감성 노동 없이 생각으로 돈을 탐하는 건 도둑질이다. 대부분이 마음으로 도둑질을 일삼으니 삶은 피폐해지는 것이다. 시장에서 감성 노동이란 세운 원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등락하는 것이다. 도둑질을 일삼는 건 마음이 선량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투자자가 생각으로 매매하는 것 또한 아직 ‘선량함’으로 부자의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톨스토이의 작품 속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이어야 하고, 「부활」의 ‘네흘류도프’여야 한다. 김진명 작가가 「카지노」에서 말하듯이 ‘선량한 사람만이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섬세함이란 형질을 지닐 수 있다. 운과 실력을 조화롭게 하는 게 심성이고, 그래야 탐욕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량함이 나 이외의 존재와 조화를 끌어내는 것이다.’ 책을 읽는 건 선량해지기 위함이고, 인문학의 지향점 역시 ‘선량함’이다. 선량함을 깨닫는 도구로 신이 만들어낸 판도라의 상자가 도박이다. 투자하는 마음의 궁극은 투자를 통해 ‘선량함’에 닿는 것이다. 독수리의 눈을 가진들 탐욕에 눈은 멀게 되고, 사자의 가슴도 탐욕에 쪼그라들게 된다.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섬세한 숙녀의 손길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선량함’에서 나온다. 파동이 등락할 뿐임을 알고 관점을 잡았더라도 (여기에 공포와 의심, 아쉬움과 끝없는 후회, 미련과 끝없는 조롱이 더해지기에, 세상 공짜 점심은 없기에) 여전히 욕망의 무저갱 속 지불시도(智不是道)에 불과하다.


중심을 잡고 물과 같이 흐름을 따라서 등락하게 하는 마음이 ‘선량함’이다. 마음이 선량하지 못하므로 유연할 수 없기에 등락하지 못하고 매번 부러지는 것이다. 파동은 등락할 뿐이란 건 체계적인 훈련만 받으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등락의 관점을 잡고 원칙으로 정한 선으로 관점을 단단하게 고정해 두지 않으면 원칙은 매번 부러지게 된다. 직선의 마음을 부러뜨려 곡선으로 등락하는 게 부드러움이고 섬세함이고, 이것은 ‘선량함’에서 나오고, ‘선량함’은 인간이 지니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형질이다. 이것이 한번 안 되면 영원히 안 되고, 좀처럼 성공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냥 걷고, 그냥 하고, 그냥 내버려두고, 그냥 기대치를 버리고, 그냥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은 지금 웃는 그 마음과 같다. 그냥 기다리는 마음, 그냥 시장에 맡기는 마음, 그냥 반복하는 마음도 지금 웃는 그 마음과 같다.




그냥 웃는 게 ‘선량함’이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깨치면 기다릴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은 비로소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하다. 과정을 중시하며, 반복하고, 등락하면서 ‘물처럼 유연해야’ 대응하게 되면서 비로소 넘어지지 않고 장애물을 하나씩 건너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유연함은 ‘선량함’에서 발현되는 형질이다. 제대로 기다려서 진입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흔들리게 되는 게 심리의 필연이다. 그 흔들리는 마음을 고정해 두는 그 마음이 ‘선량함’이다. 그냥 웃어버릴 수 없는 자, 선량하지 못한 자에게 시장은 욕망의 무저갱을 자각하게 하면서 천형을 내릴 뿐이다. 결국 투자는 선량해지면서 내 안의 부처를 만나는 마음공부가 아닐까? leverage 한다는 건 비운다는 것이다. 갈지, 안 갈지, 맞을지, 틀릴지, 잘 챙길지, 개입으로 망가질지 아무도 모른다. 선량한 마음으로 자신만의 관점과 원칙이란 창을 통해 바라볼 때만 자신만의 흐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책을 읽는 건 ‘선량함’을 더하기 위함이고, 투자하는 건 ‘선량함’에 닿기 위함이다. 그냥 웃는 게 ‘선량함’에 닿는 첩경이다.




궁극의 씨앗을 찾았다. 그것은 선량한 마음이었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선량함’에서 숙녀의 손길과도 같은 물을 닮은 부드러움과 섬세함이란 형질이 나온다. 물과 같이 유연해야 기계적으로 등락할 수 있다. 딱딱하게 굳은 감정을 ‘선량함’으로 녹여내지 못하면 단지 부러짐을 반복할 뿐이다. 부러질 수 있는 모든 건 반드시 부러지기에 실수의 여지를 최소화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부서지는 존재가 아니라 ‘선량함’으로 건너가는 그 여정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냥 웃는 게 ‘선량함’으로 가는 시작이고, 그냥 책을 읽으면서 선인들의 선례를 받아들이는 게 ‘선량함’으로 가는 길이다. 아직 나무가 충분히 자라지 않았기에 수익을 바라지 않아야 하는 단계이고, 기계적으로 등락할 수 있게 되면 자신감과 더불어 사자의 가슴으로 시장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조화로움을 찾아 확률을 높이면 그동안 자란 소박한 나무에서 달콤한 열매라는 수익을 즐길 수 있게 되고 비로소 독수리의 눈으로 전체 시장을 바라보게 된다.




”비가 내리는데도 곧 그친다고 말하면 안 되지! 구름이 그치고 무지개가 피어오르는데도 계속 비가 올 거라 말하면 안 되지! 근데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아집에 갇혀 버리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돼“

갈 수 있는 방향은 위아래 둘 중 하나다. 위로 가야 할 자리에서 가지 못하면 갈 곳은 아래뿐이다. 그렇게 위아래로 등락할 뿐이다. 항상 반대로 붙여놓고 가고, 수렴의 끝자락에서 시세가 나고, 가야 할 자리에서 가지 못하면 반대로 가는 게 파동이다. 이러한 파동의 흐름을 경험으로 자신이 검증해야 감각이 된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고 안개가 자욱하지만, 시간이 더해지는 작지만 아주 강한 반복의 힘을 믿는 마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손실을 자르지 못하거나 솟구치는 욕망에 발걸음이 엉키면 투자자는 그걸로 끝이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마크 트레인>

똑똑함의 극점에 있는 사람들이 운용하는 뮤추얼펀드의 수익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 년에 한 번 비중만 조절하는 인덱스펀드보다 수익률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예측해서도 안 되고, 그저 시간을 믿어보는 것이 더욱더 현명하듯이 시장에 맡기는 마음, 그 선량함은 투자자의 자질 중에 으뜸이다. 인덱스펀드의 수익률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냥 유리한 방향으로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 던져라. 개입으로 좋아지거나 나빠질 확률은 차이가 나지 않지만, 개입하게 되면 인간의 본성을 놓고 볼 때 전체를 좌우하는 꼬리 사건은 만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시장에 맡기는 게 단순하고 스트레스가 적고 꼬리 사건의 확률이 존재하기에 다소 유리하다.




앞고점과 앞저점의 지지저항은 수절과부의 절개처럼 앙칼져서 단번에 덮쳐 감싸서 안지 못하고 멈칫멈칫하면 포기하고 돌아서야 한다. (가야 할 자리에서 돌파나 붕괴하지 못하면 나와서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 그뿐) 미련을 가지고 질척대다가 봉변당하기 딱 좋다. 그냥 돌아서기 참 힘들겠지만,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이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강하게 쳐 주지 못하면 챙기는 게, 반대로 가면 자르는 게 상수다. 투자자는 챙기고 자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파국은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액을 분산해야 하고 leverage를 낮추어야 한다. 투자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매 횟수를 줄어야 한다. 횟수의 증가는 위험과 실수의 여지 증가와 비슷한 가중치를 가진다.




항상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절묘한 개입은 절묘하게 망칠 확률과 같다. 개입은 실수의 여지를 의미한다. 신묘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다는 건 기묘한 착각에 불과하고 드물게 초인이 나타났을 뿐이다. 똑똑함의 극점에 있는 이들의 절묘함을 앞서는 인덱스펀드의 수익률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돌고 돌아 기술적 분석으로 성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사고파는 기계적인 매매뿐이라는 가르침으로 돌아왔다. 확률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 비슷한 가중치의 장단점이 존재하므로 선택과 집중으로 leverage하고 책임을 더하기 위해 노력함이 현명하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확률의 세계에서 절묘한 개입은 절묘하게 망칠 확률과 같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투자자의 모든 행위는 비슷한 가중치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아무도 모른다’가 시장에서의 영원한 진리다. 확률의 세계에 신묘함은 없고, 핑계 없는 무덤도 없다. 사바나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록 최고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살아남아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선례를 체화해야 하고, 그렇게 일가를 이루었다면 그에게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다. 1원짜리 인간에게 최선은 돌고 돌 뿐인 탐욕과 아집을 버리고 선인들의 선례를 Ctrl+C ⇒ Ctrl+V 하는 것이다. 언제나 확률로 귀결된다는 것, 그런데도 원칙을 지키면서 그냥 등락해야 한다는 것, 선인들의 선례를 믿어야 한다는 것만 남게 된다.




대부분 투자자가 자꾸만 출발선으로 되돌아오고 출발선이 처음 자리에서 자꾸만 뒤로 밀리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든지 올 수 있고, 언제일지 모르기에 사전에 실수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 둘째는 좇기는 돈은 실수의 여지를 잔뜩 품고 있기에 ‘쓰지 않아도 되는 돈’ 즉, 돈 자체가 여유로워야 복리의 나날들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음에도 급한 돈으로 성급하게 투자했다는 것, 셋째는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투자의 쓸모는 탐욕과 아집으로 갇힌 동굴에서 ‘선량함’을 일깨워 진짜 세상을 보게 해 주는 것이다. 투자자의 스승은 수학이나 과학 선생님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은 일깨우는 도덕 선생님이라고 인식하는 게 옳지 않을까? 투자는 이토록 어려운 것이기에, 욕망의 무저갱만 볼 뿐이기에 범인의 길이 아니다. 이것이 가르칠 수는 있으되, 전할 수는 없는 이유이자, 스스로 깨쳐야 하는 길이기에 가르쳐서 일깨우기 어려운 이유다.




유리한 방향이 흐름이고, 지지저항이다. 지지저항이 갈 수 있는 공간이다. 결국에 지지저항이 전부다. 반대 방향은 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건 ‘추세는 강하고, 조정은 약하다’라는 가르침대로 (물론 수익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 수익보다는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확률 게임에서 이겨놓고 치는 단순한 방법은 유리한 것은 반복하고, 불리하면 하지 않으면서 시간 게임을 하는 것이다. 확률 게임은 ‘대수의 법칙’ ‘표본의 증가’ 즉 시간 게임을 의미한다. 투자가 업(業)이 되기 위한 선결 조건은 ‘지속 가능성’이다. 지속 가능성은 선량함으로 담보된다. 유리한 방향으로 근거 있는 진입점을 기다리면서 반복할 수 있느냐? 손실을 짧게 자르면서 반복할 수 있느냐? 수백 또는 수천 번 아니 끝나는 날까지 반복하는 이러한 단순함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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