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부터 알기, 그것이 그레이엄 코치가 우리에게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기초, 기초, 기초,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학생이 손해를 보면서도 이 점을 무시하는 것을 보아 왔다. 당신은 반드시 기초부터 제대로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화려한 것들도 해낼 수가 없다.”
<랜디 포시, 마지막 강의>
투자의 세계에서 기법의 누각을 세우기 전, 다져야 할 기초 중의 기초는 명확하다. 첫째는 내가 지금 확률 게임의 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나에게 유리한 방향, 즉 근거 있는 진입 자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습관을 몸에 새겨야 한다. 둘째는 예상과 어긋났을 때 미련 없이 손실을 짧게 끊어내는 대응의 습관이다. 정한 자리를 기다리는 인내에서 투자의 지속 가능함이 싹트고, 과감히 자르는 결단에서 수익의 ‘꾸준함’이 움트기 때문이다. 결국 투자의 기초 중의 기초, 그 최후의 보루는 기술이 아니라 투자하는 마음 그 자체다.
기초는 보이지 않지만, 수익의 높이를 결정한다. 투자의 성패는 기법이 아닌 기다림과 대응이라는 '기초 체력'에 달려 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라는 질문에 매몰되기보다 '어떻게 기다리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기초를 붙들어 기초를 다져가야 한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누구나 시장이라는 망망대해 위에 던져진 소중하고 주목할 만한 존재이며, 투자의 여정은 결국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여야만 한다. 매매의 과정에서 내면에 도사린, 결코 숨길 수 없는 원시적 충동을 발견하는 시절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는 고통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필연적 욕구’가 그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투자자는 운명이 불확실함 속으로 던진 하나의 돌이다. 투자의 유일한 직분은 기법의 습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확고해지는 것이다.
“베아트리체 시절의 저 몇 주일, 몇 달의 다정한 안정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나는 그때 하나의 섬에 도달했고 평화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그랬다. 하나의 상태를 좋아하게 되자마자, 하나의 꿈이 편안해지자마자 그것은 어느새 벌써 시들고 흐려졌다. 부질없다. 그 뒷모습을 보면 탄식함은! 나는 이제 가라앉지 않는 욕망, 팽팽한 기대의 불 속에서 살았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인간의 감정이 이토록 수시로 변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섭리다. 시장의 파동 또한 살아있는 생물이기에 인간처럼 흔들리고 변하며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한다. 끊임없이 지껄이는 좌뇌의 유혹과 시장의 끝없는 조롱이 나약한 인간의 막연한 기대에 불을 붙이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똑똑한 척하는 데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었다. 스스로 똑똑하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배워야 함을 깨치지 못했고, 그나마 얻은 경험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똑같은 실수를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해 왔다. 마치 영원히 반복되는 주식시장의 흐름처럼, 나의 어리석음 또한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자만이 스며드는 순간, 공들여 세운 원칙은 빛을 잃고 시들게 된다. ‘이제는 시장을 다 안다’라거나 ‘나만의 비책을 찾았다’라는 오만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면, 베아트리체가 선사했던 짧은 평화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엔 다시 욕망의 하이에나가 고개를 쳐든다. 투자는 완성이 있는 학문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가는 끝없는 수행의 과정이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제의 성공이 독이 되어 오늘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자만은 평화를 앗아가는 가장 강력한 약탈자다. "모른다"라는 정직한 고백만이 욕망의 하이에나를 잠재우고 다시 원칙의 자리에 서게 한다.
지루함을 견뎌내며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상태에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자, 그가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투자에서 기계적이라는 단어는 결코 무미건조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의 흐름에 온전히 맡기는 마음, 즉 원칙에 맡기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며, 인간 본성의 서정적 태도라는 알을 깨뜨린 상태다. 이는 곧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고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 ‘아브락사스’에게로 가는 길이다. 시장은 그저 끊임없이 등락하며 반복될 뿐이다. 투자는 이 반복의 공식을 찾아 기계적으로 오르내림을 함께하는 게임이며, 등락을 반복하면서도 끝내 우상향하는 시장처럼 누적 수익 또한 우상향의 궤적을 그리게 된다.
본성의 이끌림에 따라 시장의 방향을 억지로 맞추려 든다면 정신은 피폐해지고 육체는 병들기 마련이다. 거대한 물줄기에 몸을 싣는 디오니소스적 긍정만이 아브락사스에게로 가는 길이다. 뇌동과 추격이라는 방탕한 생활을 멈춰줄 나만의 '베아트리체'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낮잠 속에서 「데미안」에 묘사했던 형상을 목격했다. 그 몸의 절반은 나의 머리털 속에 박힌 채, 커다란 알에서부터인 듯 땅덩이에서 나오려고 푸른 하늘 바탕 위에서 애쓰고 있었다. 그날 이후, 파동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를 볼 때면 그 형상을 자주 마주한다. 거대한 강물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면 서정적 태도로 둘러싸인 머릿속 땅덩이에서 탈피하려 애쓰는 내 머리 위 아브락사스의 몸뚱이를 보게 된다.
원칙은 본성의 알을 깨뜨리는 강력한 망치다. 머리털 속에 박혀 비상을 꿈꾸는 아브락사스는 오직 기계적 원칙이라는 망치로 본성의 알을 깨뜨릴 때만 온전한 날개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횡보장이라 여겨 체념하면 추세가 시작되고, 이제 강하게 가겠구나! 흥분하면 시장은 다시 횡보의 늪에 빠진다. 투자자의 시계에서 ‘아직’은 늘 ‘벌써’였고, ‘벌써’는 언제나 ‘아직’이었다. 시세는 항상 수렴의 끝자락에서 예고 없이 터져 나오고, 작은 꼬리가 몸통 전체를 흔드는 것이 시장의 생리다. 이 교묘한 엇박자를 이겨낼 최고의 방법은 결국 기계적인 매매뿐이다. 인간의 뇌에 깊이 뿌리박힌 편향을 직시한다면, 시장의 흐름에 맡기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그래야만 지치지 않고 편안하게 원칙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량함과 물의 부드러움, 섬세한 운과 실력의 조화가 필요한 이 길에서 탐욕과 아집은 우리를 무저갱으로 이끄는 악마의 목소리일 뿐이다.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난 터무니없는 확신, 그 좁은 나만의 세계라는 서정적 태도를 버리고 이제는 세상과의 거대한 조화를 향해 비약해야 한다. 시장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맞추려 애쓰는 생각은 결국 돈과 시간, 그리고 심리의 낭비에 불과하다. 그저 원칙으로 정해둔 물줄기 위에 묵묵히 배를 띄우면 그뿐, 나머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은 유연하게 그려지던 흐름을 멈추어 세우는 장애물이다. ‘생각에는’으로 시작하는 예측의 문장이 계좌를 갉아먹는다. 시장의 타이밍은 인간의 기대를 비웃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유행가 가사처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아집에 갇혀 뇌동과 추격을 일삼아 왔다. 시장은 언제나 제 갈 길인 파동을 따라 흐를 뿐이기에, 나밖에 모르는 투자자는 시장과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걷게 된다. ‘나밖에 모른다면, 그렇게 원칙이 무너진다면, 아직 시장에서의 소중한 꿈을 부여잡고 있어도, 캄캄한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고’ 시장과의 틈새는 좁혀지지 않고 끝없는 평행선을 걸을 뿐이다. 평행선이 만나는 길은 오직 하나, 원칙에 입각한 기계적 반복 과정을 통해 시장의 흐름에 다가가는 것뿐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이 과연 존재하겠는가?
인간의 자만은 참으로 치유하기 힘든 값비싼 병이다. ‘나밖에 모르는’ 아집의 동굴에 갇히는 것 또한 지독한 고질병임을 투자자는 기나긴 시간을 통과하며 배우게 된다. 비록 소중한 돈을 잃어가며 깨닫는 길일지라도, 그 고통의 깊이만큼 인간의 본질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된다. 전반적인 삶의 궤적에서 본다면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투자는 고집스러운 자신을 끊임없이 버려가는 과정이다. 투자는 그 비워진 자리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하게 되는 길이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라는 자만의 노래를 멈추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겸손의 침묵으로 흐름에 한 걸음씩 다가서야 한다.
돈을 만드는 것은 감각이며, 그 감각을 빚어내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그 어떤 기법도 시간이라는 맥락을 읽지 못하면, 소중한 돈을 쓰레기로 만드는 지폐 세단기에 불과하다. 깊이가 더해지기 전, 즉 원칙을 지키며 사투를 벌여도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그 정체기에는 뇌동의 유혹이 악순환처럼 찾아오기 마련이다. 기억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는 시간이 쌓여 실력이 되고, 그 실력이 무의식적인 감각으로 굳어질 때 돈이 벌리는 시장의 구조를 말이다.
이 구조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영원히 ‘절망의 계곡’과 ‘깨달음의 비탈길’ 사이에서 뇌동의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필연적인 숙성 과정을 수용하는 순간, 뇌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편안한 매매의 입구로 들어선다. 찰리 멍거가 강조했듯, 복리의 첫 번째 규칙은 절대 불필요하게 흐름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절묘한 개입을 꿈꾸는 터무니없는 확신으로 원칙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복리는 제 갈 길을 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칙을 지키며 버티고 또 버텨라. 결국, 해결사는 시간이다.
감각은 시간의 퇴적물이다. 기법이라는 도구는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 도구를 다루는 감각은 오직 원칙을 지키며 버틴 시간의 선물이다.
“당장 원칙을 지킨다고 돈이 되는 게 아닐세. 무작정 따라 한다고 당장 부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급하면 잃을 뿐이니, 돈이 급하다면 차라리 현실의 노동에서 답을 찾으시게.” 종잣돈이 복리의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칙을 수호하며 견뎌내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성공의 공식은 단순하다. 절대 불필요하게 원칙을 어기지 않는 것, 수익이 나지 않는 고통스러운 정체기를 버티며 내면의 성장을 일궈내는 것이다. 원칙을 지켰다 어겼다 반복하는 쳇바퀴 같은 어중간함에서 이제는 벗어나 명확히 선택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원칙을 사수할 것인가, 아니면 이 길을 포기하고 평범한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
터무니없는 확신은 진입한 자리에서 즉각적인 도약을 넘어 거대한 비약을 꿈꾸지만, 대부분 파동은 도약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가야 할 자리에서 가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움직이며 투자자를 끝없이 조롱한다. 매매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간의 나약한 심리는 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쫓아가면 암탉처럼 달아나는 법이니, 스스로 알을 낳을 때까지 덤덤하게 기다려 주어야 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확률 게임에서 공포와 의심은 필연이다.
비약을 꿈꾸는 마음이 시장의 조롱을 부르고, 원칙을 잡아챈다. 암탉을 잡으려 달려들면 깃털만 날릴 뿐이다. 이를 이겨낼 길은 치열한 자기 검증을 바탕으로, 시장의 조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수익을 차곡차곡 거두어들이는 챙김의 자세뿐이다.
우리가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하는 이유는 인과관계의 구조 속에 늘 상관관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개념 모두 “A가 변하면 B가 변한다”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 ‘올바른 논리적 필연성’이 존재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갈린다. 상관관계는 그저 두 사건이 우연히 함께 일어난다는 현상의 나열일 뿐, 인과를 단정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즉, 상관은 결코 인과를 함축하지 않는다.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라고 경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라는 옛말처럼,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무질서한 자연 현상 속에서 기어코 인과관계의 모델을 찾아내려 애를 쓴다. 그러나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기법은 본질적으로 필연적 인과가 아닌, 상관관계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투자는 정답을 맞히는 수학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에 몸을 싣는 대응의 예술이어야만 한다. 그 어떤 원칙도 시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절대적 인과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상관관계의 확률로 존재할 뿐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투자자는 이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존재하지도 않는 필연적 정답을 찾아 방황하다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기법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의 힌트일 뿐이다. 기법이 가리키는 방향(상관관계)을 참고하되, 실제 결과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대응만이 수익을 보장한다.
작은 무질서가 방치될 때 범죄가 확산하듯, 투자의 세계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하면 ‘깨진 창문 이론’처럼 뇌동의 여지가 삽시간에 번지게 된다. 포커 게임에서 판의 대부분 원칙대로 이끌어가다가도, 단 몇 번만 평정심을 잃으면 파산의 확률은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고수나 프로 선수라 할지라도 가끔 중심을 잃는 것은, 투자의 세계에서는 실력과 결과의 균형이 자주 어긋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공은 노력과 재능, 그리고 기회와 환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본질의 신호에만 집중해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억지로 취하려는 탐욕,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아집, 그리고 인간의 숙명인 낙천적 편향을 이겨내기 위해 늘 방심과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시장 참여자는 언제나 불확실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부자가 부를 다루는 기술을 안다면, 투자의 상수는 베팅의 기술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자다. 워런 버핏에 관한 책을 백 권 읽는다고 그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책을 놓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없이 마주할 선택의 갈림길에서 실수의 여지를 줄여주고, 복잡한 세상을 몇 가지 객관식 문제로 단순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책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리키는 나침반이자 타인의 경험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해 주는 귀한 지도다.
실력이 아니라, 평정심이 최우선이다. 흔들리는 이유는 시장의 보상이 늘 노력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틈새에서 뇌동이라는 기생충이 자라나지 않도록, 책이라는 나침반에 의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