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도 않을 무의미한 시간대, 그저 작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뿐인데도 조바심에 어찌해 보겠다고 심리를 무너뜨리는 한심한 그를 자주 목격해 왔다. 시세가 분출할 수 있는 시간대로 매매를 한정하고, 매매 횟수를 스스로 줄이는 결단이 필요하다. 투자의 초기에 원칙을 아무리 잘 지켜도 감각이 여물지 않았기에 당장 돈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필연적인 성장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매매 시간과 횟수를 줄여야만 시장을 오래도록 응시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살피고 기다려야만, 난초에서 꽃이 피듯 시장이 선사하는 예쁜 꽃을 마주하게 된다. 진정한 상수는 단순히 결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이상이다. 원칙을 고수하며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목처럼 투자하는 마음이 단단해진 사람이다.
시간을 이기려 들지 말고, 온몸으로 버텨내라. 조바심은 여물지 않은 감각에 생채기를 낼 뿐이다. 꽃은 서둘러 핀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제시간을 견뎌내어 피어날 때 가장 향기로운 법이다.
대부분 투자자가 실패의 궤적으로 수렴하는 이유는, 적은 돈에 연연하게 만들어 원칙을 갉아먹는 머릿속 ‘톡소포자충’과 같은 기생적 기억 체계 때문이다.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쥐가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듯, 투자자의 뇌를 장악한 ‘뇌동충’은 위험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자료처럼, 이 기생충은 감염자를 무모한 이상행동으로 이끌며 사고와 자살, 조현병의 위험을 높인다. 비록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확률을 높여 줄지는 모르나, 투자자에게 이 기생충은 소중한 자산을 쓰레기통에 버리게 만드는 파멸의 전조일 뿐이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기대, 그리고 실패로 흐려진 선구안이 만드는 실수는 절망의 계곡 바닥까지 밀어 넣는다. 하지만 이 뇌동으로 방황하는 ‘사춘기적 시기’는 제대로 된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의 과정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을 최고 포식자로 군림하게 했던 생존 프로그램이 현대 투자의 세계에서는 독(뇌동충)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시장은 쉬운 파동보다 도약하는 척하며 흔드는 함정이 대부분이기에, 뇌동충이 활성화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확률로만 설명되는 이 냉혹한 곳에서 뇌동충에 감염된 투자자는 어느새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쥐처럼 무모해지고, 결국 고양이 앞에 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투자의 상수는 원칙을 지켜낸 시간의 총합이다. ‘단 하루라도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사춘기적 방황을 끝내고 원칙의 비탈길을 오르라. 남겨진 길은 원칙을 지키는 시간의 크기를 하루하루 키워나가는 것뿐이다.
“실용주의의 시초인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라고 말했다. 실험은 반복할수록 점점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실험은 실패했어도 방법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에 모든 것이 성과다. 이처럼 모든 인생은 실험이라 생각하면,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것저것 고민하기 전에 일단 직접 행동으로 옮겨보고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얻는 모든 결과가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가야 게이치, 부자의 인문학>
투자자는 철저한 자기 검증으로 세워진 원칙을 지켜내는 시간 속에서, 그 어디쯤에서 ‘돈이 돈을 만든다’라는 당연한 믿음을 뿌리내려야 한다. 원칙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빠르게 실패하고, 행위를 반복하며, 그 깨달음으로 빚어진 감각을 통해 수익이라는 필연을 만들어 내야 한다. 투자자가 심리적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두 가지 사고의 기둥이 필요하다. 첫째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분리하고 파동을 확률로 전제하는 ‘연역법적 사고’다. 둘째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유물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경험과 통찰, 감각을 쌓아 실질적인 승리를 쟁취하려는 ‘실용주의적 자세’다. 비즈니스나 투자 분야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상황이 급변할 때 기민하게 적응하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지닌 자가 성공한다.
손실은 실험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 조건에서는 이런 확률이 나온다"라는 실험자의 눈으로 시장을 보라. 원칙의 틀 안에서 반복되는 실험은 결국 수익이라는 필연을 낳는다. 연역적으로 확률을 수용하고 실용적으로 내공을 쌓아간다면 마침내 자신만의 무기를 얻을 것이다.
인간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려는 ‘귀납적 사고’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 익숙함이 확률적 사고와 대응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미숙함을 낳는 원인이 된다. 귀납적 사고의 과정에서 단 몇 번의 우연한 성공이 확정적 신념이라는 잘못된 전제로 굳어지면, 이는 인간 본연의 도박적 사고를 자극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투자는 돈과 심리가 얽히는 긴박한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확신과 낙관적 편향에 기댄 파멸의 도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붙들어야 할 연역적 사고의 보편타당한 일반 전제는 명확하다. “파동은 등락하며, 본질적으로 확률적이고, 오직 통계로만 접근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진입의 기준 또한 ‘수익이 날 자리’라는 예측이 아니라, ‘손실은 짧고 이익은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자리’, 즉 ‘확실히 대응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짧은 손실을 기꺼이, 그리고 끊임없이 확정하는 반복 과정을 통해 스스로 표본의 개수를 늘려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누적 수익과 자신감, 그리고 날카로운 감각이라는 긍정적 요인들에 비로소 가속도가 붙게 된다. 상승추세에서 지지가 확인될 때, 강한 시세가 나올 확률이 높으면서도 설령 무너진다 해도 손실이 짧기에 진입한다는 것—이것이 바로 승률에 목매지 않는 확률적 사고의 정수다.
확신은 버릴수록 좋고, 대응을 취할수록 유익하다. 귀납적으로 쌓아 올린 "이 자리는 무조건 간다"라는 신념은 마음속에 블랙스완을 키운다. 거대한 변동성이 요동치면 그 신념은 흉기가 될 것이다.
“칸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한 독서의 가치를 믿었고 성공적인 투자에는 인내심, 규율, 회의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저평가된 투자 대상은 대개 처음에는 시장에서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남에게 어떤 주식이 투자할 가치가 있을지 제안하게 하는 것은 게으른 짓이다. 그래서 규율이 중요하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투자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자신이 해야 할 힘든 과제를 수행하고 숫자를 검토하는 자기 규율이 있어야 한다.”
<로널드 챈, 가치투자자의 탄생>
투자자는 인간 본성인 확증 편향에서 비롯된 성급함과 초조함, 서두름을 철저히 극복하고 인내심으로 기다림의 미학을 완성해야 한다. 또한 생존을 위해 진화된 낙천적 편향을 경계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며 대응의 완성도를 높여가야 한다. 그렇게 세워진 자신만의 규율은 지속적인 반복의 기준이 되며, 타인의 소음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이란 속박이 아니라, 불확실한 시장에서 자유롭게 대응하게 만드는 단단한 환경이다.
게으른 확신보다 부지런한 회의가 낫다. 회의적인 시각으로 대응하게 되면 게으를 틈이 적어진다. 남이 찍어준 종목에 인생을 맡기는 것은 사고하기를 포기하는 선언이다. 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요행을 바라며 방랑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브라운은 가치투자자를 가리켜 ‘걱정이나 다른 집착에서 해방된 평온한 상태’를 가리키는 아타락시아라는 희귀한 심리적 질병을 앓는 사람일 것이라고 표현했다. “가치투자자는 아타락시아를 겪습니다.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남이 어떻게 하든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일 신문을 읽다 보면 타인의 의견과 논평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치투자자라면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서적, 지적 체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격에 맞는 올바른 투자 대상을 찾는 객관적인 방법에 닻을 단단하게 내려야 합니다.”
<로널드 챈, 가치투자자의 탄생>
양방향의 파동이 요동치는 시장에서 ‘가치투자’나 ‘장기투자’라는 개념은 결국 ‘원칙을 반복하는 투자’로 치환될 수 있다. 투자자는 스스로 정립한 객관적인 원칙에 닻을 내리고, 그 원칙을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성장한다. 이 객관화된 닻은 복잡함의 미로를 견뎌내고 마침내 단순함의 진리에 도달한 이들에게 시장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흔들림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는 자만이 성공의 열매를 맺는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말처럼 시장은 단기적으로는 인기투표를 하는 투표기일 뿐이나, 장기적으로는 가치를 측정하는 저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합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평온함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에서 나온다. 성격에 꼭 맞는 단 하나의 원칙에 닻을 내리고, 시장이 투표기에서 저울로 변하는 그 긴 시간을 덤덤하게 반복으로 채워가야 한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가장 똑똑한 개체도, 가장 강한 개체도 아니다. 오직 변화하는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한 개체만이 생존의 문을 통과한다. 찰스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은 언제나 경쟁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시장이라는 거친 파동의 환경에서 적응한 개체란, 살아남는 치열한 과정에서 감각을 단단히 다졌거나, 혹은 그 감각을 통해 환경에 완벽히 동화된 투자자를 의미한다. 진실로 소중한 부를 갈구한다면, 지금 당장 유혹하는 ‘성급함과 초조함과 서두름’이라는 내면의 경쟁자들을 가차 없이 희생시켜야 한다.
야구에서 훌륭한 타자가 전성기를 맞이하기 위해 청춘의 숱한 유혹을 뿌리쳤듯이, 투자자는 일순간의 기분에서 불쑥 고개를 드는 터무니없는 확신을 내려놓는 법을 스스로 깨쳐야 한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싶은 그 신념들을 원칙이라는 차가운 이름으로 희생해 가는 시간—그 시간의 끝자락 어디쯤에서 원하는 성공을 만나게 된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경험이 내공이 됨을, 그리고 시간이 빚어낸 통찰력이 병아리 눈물만큼씩 느리게 쌓여 날카로운 감각이 됨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편향된 신념이 버려지면서 투자자는 진화다. 투자의 적자생존은 '내면의 본능'을 희생시키는 자에게 허락된 진화의 과정이다. 시장에서 신념을 믿고 환경에 맞서거나 본능의 명령에 굴복할수록 몰락은 가속될 것이다.
투자는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우리의 주의를 흩뜨리고 심리를 흔드는 시장의 전술에 맞서, 누가 더 덤덤하게 버티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심리전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더 많다. 여기서는 인내심이 곧 규율이며, 회의적인 시각은 자산을 지키는 방패와도 같다. 원칙에 따라 챙기고 자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답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시장은 본래 수시로 틀릴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치명적인 것은 회의적 시각으로 인한 후회나 조롱이 아니라, 낙관적 편향이 불러오는 최악의 참사다. 심리가 무너진 상태에서 감행하는 무모한 ‘한방’이나, 역방향 추세 앞에서 손을 놓은 채 올리는 기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부른다. 시장에서는 장렬하게 맞서 싸우는 것을 용기가 아닌 무모함이라 부르고, 이겨놓고 싸우기 위해 묵묵히 기다리는 것을 진정한 대범함이라 부른다. 모순적인 세계에서 다음 수를 기약하며 기다리는 마음보다 강력한 창과 방패는 없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돈을 잃고 결핍 속에 살아가는 이에게 하루하루는 얼마나 길고 고통스럽겠는가. 자본 없는 삶에서 예술의 길고 짧음을 논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잃지 말아야 한다. 수익이 복리로 쌓이면 자신감이 생겨 투자 행위가 긍정적인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지만, 자산을 잃기 시작하면 심리는 순식간에 파멸적인 투기로 변질된다.
투자는 시장의 유혹에 덤덤함으로 맞서는 심리전이다. 낙관적 편향에 빠진 기도는 파멸을 부르지만, 원칙에 근거한 회의적 시각은 자산을 수호한다. 돈이 없는 긴 인생의 공포를 기억한다면, 마음은 원칙의 선 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시장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어쩌면 야구 때문일지 모른다. 멍하니 서 있다가 삼진으로 물러나는 허망함을 피하려다 보니, 존을 벗어난 높은 공과 낮은 공에 무분별하게 반응하며 타율을 낮춰간다. 그러나 고타율의 비결은 단순하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정직한 속구(유리한 방향)를 기다려, 공의 결대로 배트를 세워 맞히는 것이다. 까다로운 변화구에 매달리지 않고, 오직 정한 존에 들어오는 공만 결대로 공략할 수 있다면 남은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야구에서 3할 이상이면 고타율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대응의 예술이란 10번 중 7번의 실패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다림, 진입, 자름, 챙김, 갈아타기’를 기계처럼 반복할 수 있도록 감정을 자제해 가는 대응 기술을 끌어올려야 한다. 아닐 때 기꺼이 손실을 확정 짓고 태연하게 다음을 준비하는 무심함이 곧 투자자의 성장이다. 숱한 기회 중 내가 완벽히 아는 공이 올 때까지 무한히 기다릴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겐 있다.
투자에서 ‘보이지 않은 손’은 삼진을 선언하지 않는다. 당신을 아웃시키는 유일한 존재는 나쁜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자신의 성급함이다.
사물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하는 법이다. 세상사가 그러하듯 시장의 파동 또한 끊임없이 등락한다. 이 자명한 이치를 깨닫고 등락대응(騰落對應) 하는 자는 마침내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달콤한 열매를 맛볼 것이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뇌동추격(雷同追擊) 하는 자는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섭리 앞에 한탄의 눈물만을 흘리게 된다. 등락하는 파동 속에서 극점을 오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실수가 시스템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성장을 위한 미미한 비용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투자자는 모름지기 절대 파산하지 않으며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종잣돈의 증가가 곧 수익금의 증가로 직결되는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만큼 변덕스럽고 믿지 못할 것은 없기에, 감정을 철저히 배제할수록 그 시스템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원칙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시장에서 인간의 똑똑함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어설픈 지식의 파편에 의지하기보다, 꾸준함의 힘을 믿고 무한히 반복할 때 시스템은 투자자 자신과 혼연일체가 된다. 숨 쉬듯 반복하는 그 시스템, 그것이 바로 무너지지 않는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