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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건 연어의 몫이다.

by 황금지기

연어는 죽는다. 연어에게는 종족 번식이란 대의가 있지만, 투자자에겐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참사일 뿐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미천했음을, 미성숙의 상태였음을 알아차리고 올바른 습관이란 토대 위에서 여유롭게 시장을 관조해야 하며 인생은 수동적 성격을 띠기에 자신 안에서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찌할 수 없는 흔들림은 당연하기에 횟수와 빈도를 줄여야 하고, 선량함의 탈출을 추는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설프게 남은 지식은 ‘척’하는 자만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이 ‘대응의 예술’이라는 대전제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았기에 ‘인간 본성의 기본값’으로 되돌아가는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장애를 딛고 선순환 구조로 갈 수 있는 단단한 방법이 무엇일까? 유리한 방향으로 근거 있는 진입만 하는 습관이라는 돈으로 환산되지는 않지만, 작지만 단단한 도미노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미래를 깎아내리는 행동이 그렇게 요지부동의 습관으로 남는 진화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마음은 미래뿐 아니라 돈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도 서툴다.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을 통해 작지만, 건전한 습관을 만들어보는 게 선순환 구조의 첩경이다. 「the one thing」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주마처럼 옆을 볼 수 없게 눈을 가리고, 인생에서 복잡한 다른 것들을 싹 정리하라. 일단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린다면, 그 뒤로 줄줄이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도미노나 혹은 이미 쓰러져 있는 긴 도미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잦은 진입이 필연의 심리적 흔들림을 낳게 되는 횡보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만, 아직껏 진입해서 손실 당할 일을 걱정하고 있다면 (막연하게 지금 들어가면 이익이 날 것만 같아 마음이 흔들린다면) 아직 한참 더 깨져야 한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건 연어의 몫, 그렇게 연어는 죽는다. 연어에게는 필연의 종속 번식이란 대의가 있지만, 투자자에겐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참사일 뿐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임시직일 뿐이었다. 알게 되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삶에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하든 삶은 기꺼이 내주게 되어 있거늘.” 삶은 곧 질문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방식이 곧 우리의 해답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성공에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 이번의 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다음 순간에 무엇을 경험하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도하게 낙관적이고 자신 능력에 대해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결과에 수반되는 과정을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를 범한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계획의 오류’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로 과정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the one thing>

인문학적 소양이 미천했음을, (그 사실조차도 모른 채)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미성숙의 상태였음을 알아차렸다. ‘서정적 태도라는 알(헤르만 헤세가 말하듯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알을 깨고 나와야 선량함에 이른다)’을 깨뜨리지 못했음을, (당연한 독선과 아집으로) 탐욕으로 필연의 복잡함에 갇혀 leverage 하지 못했음을 눈치챘다.




과거에 그는 해외선물에서 평균 진폭의 1/5밖에 나오지 않는 시카고가 잠든 아시아장에서 추세를 탐했고, 추세와 등락과 횡보가 심중(心中)에서 실타래처럼 엉킨 상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는 ‘파동은 등락한다’라는 무의미한 관점을 무모하게 유지했을 뿐이었다. 항상 터무니없는 욕심에 사로잡힌 몰지각함은 어처구니없게 의지를 쓰레기통에 버렸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욕망의 사로잡힌 채로 뇌동과 추격으로 점철되었다. 시장의 구조를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한 전략적 실패로 세부 전술은 늘 무용지물이었고, 실전은 탐욕의 도화선에 불과했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자신만의 축제 안에서 나이가 들었고, 시장 곳곳에 널린 처절한 욕망으로 죽어 간 숱한 시체들의 흔적을 밟으면서 자기 성찰의 길, 자기 극복의 길을 걷고자 다짐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인간의 의지력도 수렴해야 발산할 수 있고, 발산하면 수렴해야 하기에 심리적 흔들림이 적고 손실 확률이 적은 구간에서 스스로 검증한 방법으로 원칙을 지켜나감으로써 조그마한 의지력으로도 충분한 습관(66일의 법칙)을 만든 이후에 부를 확장해야 한다. 배운 대로 「아주 작은 반복의 힘」과 「the one thing」으로의 「leverage」 법칙에 따라 건강과 일상 그리고 돈과 심리의 균형을 맞추어 가야 한다. 의지는 숙면과 건강에서 충전되고, 선순환 동그라미의 마음도 건강에서 양분을 얻는다. 올바른 습관이란 토대 위에 우뚝 솟은 직관의 탑 위에서 여유롭게 시장을 관조해야 한다.




어쩌면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욕망과 손 쓸 틈도 없이 재빠르게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생각들, 수시로 흐름을 바꾸는 지껄임으로 인해 의지와 노력이라는 발버둥과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나는 문제는 별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투의 과정을 거치면서 투자와 삶에 대해서 제대로 진단했고, 살아가는 동안 취해야 할 분명한 태도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비상한 것이다. 비록 불쑥 화를 내고, 어느 순간 고집스러운 언쟁을 벌이고,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 후회하고, 재차 다짐하는 인간 필연의 과정을 반복하겠지만, 의지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자신을 스스로 돕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찾았다고 조금은 자부할 수 있다. 방금 샘물처럼 솟아올랐던 생각들도 잠시 딴생각에 팔리면 여러 갈래로 갈라져 골몰해도 생각이 나지 않기에 솟아난 생각들에 집착해서 적어두지만, 그렇게 잊히지 않고 글이 된 생각들도 내가 읽는 순간에만 다시 살아나게 되는 그런 게 인생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감정은 수시로 변하고, 그렇게 봄을 한 번 더 보면서 알아가는 수동적 성격을 띠는 게 인생이다. 모든 건 흘러가고 변한다는 게 인간사 필연이고, 무지를 알아가면서 앎에 다가서고, 약함을 알아야 약함이 강함의 씨앗이 되는 과정들은 지극히 인간다움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다를 수 있음’을, 자신 안에서는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 아닐까? 「클루지」에서는 우리의 통제력을 잃게 만드는 ‘인지적 클루지의 얄궂은 장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흥분의 순간에 너무 자주 반사 체계에 우선권을 넘겨주는 어설픈 자기 통제 장치, 언제나 (또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확증 편향, 근거가 있든 없든 자신의 신념을 옹호하게 만드는 확증 편향의 사악한 쌍둥이라 할 동기에 의한 추론,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날 때면 그에 대한 불쾌한 과거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맥락 의존적인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것들이 합쳐져 차가운 이성을 압도하는 ‘뜨거운’ 체계를 만들어낸다.”




투자자가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갖가지 편향으로 인해 실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착각하기 때문이다. 투자에 있어 어떤 원칙도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견딜 수 있지만, 실전에서 원칙은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되므로 늘 뒷전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변동성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필연적 공포와 의심, 좌뇌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자책과 후회의 외침에 더해지는 시장의 끝없는 조롱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잘못되었다 자책하면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의 끝없는 조롱을 고도로 훈련된 내공이 아니고서야 과연 견딜 수 있겠는가! 이제 투자자가 감당해야만 하는 진짜 수수료이자, 실력이고 베팅을 계속할 수 있는 밑돈이다. 그 어떤 의지도 철저한 자기 검증 없이는 추풍낙엽이 되어 시장이란 황량한 거리를 뒹굴게 될 것이다. 철저함이 경험이라는 충분한 시간과 어우러져 ‘투자하는 마음’에서 자기 확신’으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야 비로소 투자자의 반열에 들어섰다 하겠다. 거기에 인문학적 소양이 더해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만이 끼어들 틈이 없어야 ‘결대로, 이겨놓고, 세워 놓고’ 치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제시 리버모어는 이렇게 말했다.

“투기꾼이 자만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돈을 지급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처참하게 부서진 것은 모두 자만 때문이다. 참 돈이 많이 드는 병이다. 어디에 있던지 누구든 감염될 수 있다.“




젊은 날의 초상 ①

하늘이 부르는 장단에 춤추며 부서지는 빗줄기로 서서. 나로 인해 세상은 세상이다. 외쳐보지만, 언제나처럼 기다란 정체의 늪. 흐르는 강물 안에서 잠이 든다. 의식이 잠든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고독의 창살 아래서 외침은 작아지고, 일렁이는 외로움에 부딪히는 술잔 아래서 가는 눈동자의 막다른 응시. 비탈진 밭고랑에 접어두고 살아온 이상의 씨앗을 뿌리고 계절 따라 성스러운 노동의 은총이 내려 내 일군 이랑에 꽃은 피는 게 즐거워도, 세상 밖에서 기다리려 함은 숨쉬기 위함이다. 내 떠나도 그대로 남을 세상이라면 하늘이 부르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동안 아침 안에서 영롱한 이슬 키우는 사철 파란 잎새가 되고 싶다.

‘흔들리는 인간’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스스로 바로잡아가면서 끊임없는 내적 탐구로 올바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톨스토이의 ‘레빈’ ‘네흘류도프‘ 두 사람이 투자자에게 요구되는 인간상이 아닐까? 치통을 생각했을 때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가 일반적인 진실이라고 표현한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본성을 생각했을 때 ’나는 흔들린다. 고로 존재한다‘야 말로 투자자에게 어울리는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어찌할 수 없는 흔들림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선인들은 지혜는 매매 횟수를 최소화하고, 평가 빈도를 줄이라고 조언하고 있지 않은가!




투자에서도, 관계에서도, 글에서도 자신을 떼어내야 한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나면서, 작지만 단단한 습관은 싹을 틔우고, 알을 깨고 또 다른 세계로 비상하게 된다. 인간 본래의 자신이었던 새가 되어 비상하게 된다. 20살을 넘긴 딸아이가 한 말이다.

“아빠는 다수의 의견을 듣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아빠 의견대로 하잖아. 아빠는 늘 그런 식이었어.”

많이 안다는,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 내 의견만 고수해 왔던 어설픈 앎이 투자에서도, 삶에서도 늘 문제였다. 투자에서는 특히 답을 본성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찬찬히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삶은 확증 편향과 맥락 의존적 기억 체계에 충실한 동기에 의한 추론의 세월이었다. ‘자기만의 세계, 자기 고집, 아집과 독선, 경직된 갇힌 사고’로 관계하는 사람에게서도, 책을 통해서도 지혜를 얻지 못했다. ‘인간 본성은 바뀌지 않고, 마음은 수시로 바뀐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고, 한번 안 되면 영원히 안 된다.’ 너무나도 분명한 이 명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선택적 집중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습관을 믿어보는 게 현명한 해결책이 아닐까? 꼬리가 전체를 좌우하고, 2할이 8할 이상을 움직이며, 하나의 습관은 등비수열의 도미노가 된다.


열 가지 일이 놓여 있다면 반드시 다른 모든 노력을 필요 없게 하거나 쉽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 아집(我執)과 독선(獨善)은 나만의 세계라는 집에 갇혀 홀로 선량함의 탈춤을 추는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는 도덕적 요구가 낮아 오만한 인간이 되어버린 혁명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이러한 인간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혁명가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 그것도 뛰어난 점은 그들 사이의 도덕적 요구가 보통 사람들보다 높다는 사실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절제, 엄격한 생활, 진실함, 청렴뿐 아니라 공공의 대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놓겠다는 각오가 필수였다. 그 결과 그 사람 중 평균 수준보다 높거나 그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은 보기 드문 도덕적 경지의 본보기가 됐다. 한편 평균보다 낮거나 그보다 훨씬 낮은 사람들은 대부분은 진실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동시에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인간이 됐다.’




젊은 날의 초상 ②

心中에서 꿈틀대는 분노의 일렁임에 화답하려 한다. 心中의 한가운데 도끼 꽂아 심연에 잠든 의지라 믿어왔던 그대를, 인내라 믿어왔던 그대를 깨우려 한다. 황량한 대지를 바라다보고만 있자니 가슴이 미어져서 아니 되겠다. 형태를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분열되어 가는 의식을 바라다보고만 있자니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아니 되겠다. 반을 살았거늘 남은 건 한 줌의 허무와 心中을 타고 내리는 우수의 빗줄기뿐. (중략) 삶이 삶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나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백지 위에 처음부터 다시 인생을 수놓더라도 의식이 숨 쉬는 자의 것이기를 바랄 뿐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면서 Ctrl+C 그대로 Ctrl+V 과정을 거쳐 온전히 내 것으로 체화해야 하지만, 마음에 ’선량함‘보다 자기 독선과 아집이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만한 ’더하기’와 ’빼기‘ 과정, 즉 Ctrl+X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배운 지식의 글씨는 점차 회색빛을 띠게 된다. 그렇게 어느 순간 기억 저편으로 Ctrl+E 되는 쓸모없는 파편 난 지식만 쌓이게 된다. 어설프게 남겨진 지식은 ’척‘하는 자만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되면서 쓸모없는 지식인 줄도 모른 채로 쓸모없는 것들에 취해버린 헛똑똑이로 살게 된다.




승자의 게임에서 결과는 승자의 승리 행동으로 결정되지만, 패자의 게임에서는 패자의 지는 행동으로 결정된다. 프로 테니스 선수 간에서는 승자의 행동으로 결과가 결정되지만, 아마추어 경기는 경기에서 승자는 상대방이 더 많은 점수를 잃기 때문에 더 높은 점수를 얻게 되고, 패자의 어리석은 실수로 인해 약 80%의 점수를 잃는다. 투자도 패자의 게임이다. 승자는 단순히 실수를 적게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우수한 결과를 얻지만, 패자는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투자에서 실수는 일반적인 채권과의 자산 배분 실수, 시장의 시간을 맞추어서 바닥에서 사고 꼭대기에서 팔려고 하는 시도로 대부분 너무 늦게 팔거나, 너무 늦게 사는 두 가지 모두를 자주 반복하게 되는 시장 타이밍 실수, 유행을 좇다가 큰 손실을 보게 되는 선택의 실수, 고집스러운 변덕으로 실수를 한 후, 손실을 보고 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신속하게 수익을 내는 등의 고집스러운 실수 네 가지다.

<패자의 게임에서 승리하는 법 – 찰스 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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