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이 원칙을 꺾어버린 채 뇌동과 추격으로 돈을 탐하는 것은 도둑질과 다르지 않다. ‘오르겠구나, 혹은 내리겠구나’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마음으로 도둑질한 것이나 다름없다. 방향을 예측하거나 따라가고 싶은 충동은 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언젠가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어 원칙을 파괴할 독이 된다. ‘이제 오르겠지’라는 기대치가 들어서는 순간, 마음은 이미 무아를 잃고 뇌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투자는 기계적이어야 한다. ‘기계적’이라는 말은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결과에도 기대치를 두지 않는 무심함을 뜻한다. 투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누구나 자만이라는 불치병과 터무니없는 확신이라는 고질병을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한다. 투자가 어려운 이유는 애초에 이기심과 생존에만 특화되도록 진화했기에 투자와는 맞지 않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투자가 확률 게임이기에 노력한 시간만큼 실력이 선명해지지도, 수익으로 직결되지도 않는다. 무아의 단계에서 원칙에 입각한 기계적 매매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완성되는 감각이 바로 투자의 도달점이다. ‘감각적’이란, 원칙에 따라 자르고 챙기는 과정에서 수익이 자연스럽게 누적되는 상태, 즉 나만의 유일한 정답을 의미한다.
예측하는 마음에는 원칙이 자리 잡기 어렵다. "이제는 오를 것 같다"라는 예감은 사바나 초원의 뇌가 던지는 미끼다. 기계처럼 기대치를 지우고, 원칙이 가리키는 대로 반복하는 어느 순간 감각이라는 신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네잎클로버라는 ‘행운’을 찾기 위해, 발밑에 지천으로 핀 클로버의 ‘행복’을 무참히 뽑아버리고 있을까? 행복은 아주 작은 일상에도 숨어 있지만, 그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손을 떠나버린 뒤일 때가 많다.
시장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을 보여주는 이유는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다. 투자는 확률적 우위를 찾는 게임이며,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은 일정한 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 또한 습관이라는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기대치가 너무 높아 쉽게 행복해하지 못하며, 확률적 사고에 취약한 뇌 구조를 타고났다. 그러니 이 게임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시냇물이 굽이쳐 결국 넓은 바다에 닿듯, 그저 하루하루 흐르는 확률의 강물에 온몸을 맡겨라. 그렇게 바다에 닿아 자신만의 배를 띄우고 즐기는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행운을 낚으려다 행복을 자주 놓친다. 수익에 대한 강박이 일상과 평온함을 파괴하게 두는 자체가 투기다. 시장의 관성을 믿고 확률의 강물에 원칙의 배를 띄워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투자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똑같아 보이는 자리인데 어떨 때는 시원하게 가고, 큰맘 먹고 들어가면 박스에 갇히며, 망설이다 보내 주면 쉬운 파동이 터져 나온다. 투자의 본질이 ‘언제든지 아닐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확률 게임이기 때문이다. 뇌동하고 추격하는 것은 마치 주사위의 눈 하나에 베팅하는 것과 같아, 반복할수록 필패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경험과 감각이 부족할지라도 원칙이라는 틀을 붙들 수만 있다면, 투자는 홀짝을 맞추는 50%의 게임으로 변모하며 최소한 파산하지 않는 생존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배움이 원칙을 세우고, 경험이 그 원칙을 다듬어 가며 감각이 원칙을 온전히 바로 세우게 되면 주사위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뀐다. 숫자 5나 6만 나오지 않으면 이기는 66% 이상의 유리한 게임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숙련의 경지에 이르면, 오직 숫자 6만 나오지 않으면 승리하는 80% 이상의 주사위 게임을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동은 본래 박스 구간이 길어 등락이 고만고만하기에 지루하고 어렵지만, 정작 시세가 분출할 때는 인지하기도 전에 아주 빠르고 제각각인 모습으로 달아나기 마련이다.
투자는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확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50%라는 홀짝의 벽을 넘어서는 힘은 경험의 축적에서 나온다. 패배의 확률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작업이야말로 투자자가 평생 매달려야 할 본질적인 과업이다.
“우리가 아무리 정교하게 선택하고, 운을 잘 지배할 수 있다고 자만해도 결국 최후는 운이 결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해결책은 품위뿐이다. 품위란 환경에 직접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계획된 행동을 실행한다는 뜻이다. 그 행동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히 최상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이다. 억압 속에서 품위를 유지하라. 이는 아무리 보상이 크더라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태도다. 또한 체면을 지키려고 결투하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 행운에 속지 마라>
거창한 기대치를 내려놓고 시장의 시시비비를 가리려 들지 마라. 그저 오르내리는 파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원칙으로 다져진 방식대로 기계적 매매를 반복하는 진지한 하루를 살아라. 투자의 능력은 한두 번의 운이 아닌 반복성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기계적 반복의 길 위에서, 감각적이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과는 운의 영역이나 과정은 품위의 영역이다. 투자자의 품위는 오직 원칙의 일관성에서 나온다. 결과가 비록 불확실한 운에 의해 좌우될지라도, 품위 있는 반복을 멈추지 않는 자만이 운의 파도를 타고 넘어 필연의 수익이라는 대지에 무사히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당신이 매일 장시간 피아노 연습했음에도 간신히 <젓가락 행진곡>만 연주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게 된다고 상상해 보라. 바로 이런 비선형성 때문에 사람들은 희귀사건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에 좌우되지 않고 성공하는 길이 많음에도 끝까지 끈기를 발휘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은 보답받는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시장이 하락했을 때 증권을 매수하면 이득을 얻지만, 사람들은 임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전혀 매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상받기 직전에 포기해 버린다.”
<나심 탈레브, 행운에 속지 마라>
투자의 세계에서 인과관계가 정비례로 진행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곧 포기의 지름길이다. 두뇌는 본능적으로 비선형성을 이해하기에 부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루한 박스권에서 허망한 실적에 상심하며 꺾이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음의 문이 열릴 것이다. 시장에서 오랫동안 버텨낸 투자자는 안다. 반복하면 반드시 복이 찾아오고, 포기하면 그 즉시 모든 가능성은 소멸한다는 사실을. 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 마음이야말로 캄캄한 미로 속에서 나를 인도하는 유일한 등불이다. 각자의 등불에 의지해 임계점의 고통을 견뎌내는 그 시간만이, 마침내 우리를 바다로 이끌 것이다.
버티는 자만이 비약한다. 성장은 직선이 아닌 계단식 비선형으로 이루어진다. 매일의 원칙 준수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기 위한 임계점 에너지를 모으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다.
화면 속 프로야구 선수들의 플레이를 무심코 평가하지만,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이 감내한 치열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리 위대한 타자나 투수라 할지라도 모든 시기가 좋을 수는 없으며, 매 순간이 쉽지 않다. 결국 관건은 그 고통스러운 슬럼프와 정체기를 어떻게 극복하며 숙련의 시간을 쌓아 가느냐에 달려 있다. 타자가 안타 확률이 낮은 유인구를 골라내며 끈질기게 기다려야 장수하듯, 투자자 역시 확률이 낮은 구간을 인내하며 흘려보내는 기다림의 치열함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원칙을 사수하며 쌓인 실전 경험만이 누적 수익을 쌓아가는 감각에 닿게 한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해진 계단을 밟아야 한다. ‘경험 → 내공 → 통찰 → 감각’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건너뛸 수 없는 길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스스로 이 운명의 강을 건너야만 한다. 원칙에 입각한 기계적 매매가 무한히 반복될 때, 비로소 ‘직관적 = 기계적 = 감각적’이라는 삼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기억하라.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매매는 자석에 이끌리듯 ‘뇌동적 = 탐욕적 = 파멸적’인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어 있다.
감각은 감정에 각을 세워가며 스스로 체화하는 것이다. 프로의 감각이란 끊임없는 기계적 반복 끝에 세포 하나하나에 원칙이 스며든 상태를 의미한다. "느낌이 좋다"라는 말은 "원칙 준수가 빚어낸 감각으로 느끼고 있다"라는 뜻의 다른 표현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과 주가의 관계는 마치 엄마와 아이의 관계와도 같다. 아이가 결국 엄마의 품으로 돌아와 안기듯, 요동치던 주가도 반드시 돌아와 머물게 되는 그 지점이 바로 투자자 각자의 ‘스트라이크 존’이 된다. 이미 버스가 출발해 버린 듯 이격이 벌어진 상태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추격이나, 선 아래로 무섭게 떨어지는 칼날을 잡는 행위는 일순간의 기분이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확신에 눈이 먼 뇌동일 뿐이다. 야구에서 타자가 존을 벗어난 공에 자꾸 손을 대면 타율은 추락하고 퇴출의 시간만 앞당겨지듯, 원칙의 선을 벗어난 매매는 투자자를 시장 밖으로 밀어낼 뿐이다.
하지만 투자는 야구보다 훨씬 관대하다. 투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이 들어올 때까지 공을 흘려보내도 삼진 아웃이 선언되지 않는 게임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고 기다림의 미학을 온전히 실천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원하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강력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상수와 하수의 차이는 실력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현혹적인 가격에서 눈을 떼고 원칙의 선을 응시하는 시간의 차이이며, 나만의 존을 벗어나는 유혹을 무심히 흘려보낼 수 있는 기다림의 차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을 속이고서 시장 품에 안길 수는 없다. 엄마의 품을 떠난 아이가 위태롭듯, 이격이 벌어진 시세를 추격하는 것은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가격의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정한 존에서 기다리는 것이 원칙에 정직한 것이다.
책상 앞에서 계획하는 나와, 시장 안에서 실행해야 하는 나는 다른 사람이다. 원칙을 악착같이 세우고 다듬는 이성적인 나와, 그 원칙을 고통스럽게 지켜내야 하는 본능적인 나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이것이 삶의 본질을 찾고 성취를 이루는 데 있어 마주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이것이 인간의 태생적 한계이기에, 수많은 지혜의 책들은 우리에게 각기 다른 언어로 하나의 진리를 설파한다.
그릇의 크기를 키우며 꾸준함으로 밀고 나가라는 「부자의 그릇」,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여 삶을 최적화하라는 「레버리지」, 오직 단 하나의 핵심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는 「The One Thing」, 그리고 빠르게 대응하며 감각을 깨우라는 「빠르게 실패하기」와 아주 작은 반복의 시간 속에만 궁극의 정답이 존재한다는 「아주 작은 반복의 힘」. 이 다섯 가지 책이 만나는 교집합에 갈구하는 성공이 숨겨져 있다.
계획은 머리가 하지만, 완성은 마음이 한다. 계획하는 내가 아무리 훌륭해도 실행하는 내가 뇌동한다면 그 원칙은 죽은 문장에 불과하다. 다섯 권의 지혜가 가르치는 대로,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원칙에 집중한다면 계획하는 나와 실행하는 나는 한 몸이 될 것이다.
시세의 에너지를 액체의 흐름으로 바라보면, 시세 직후의 횡보나 조정이나 파동의 등락이라는 시장의 본질을 훨씬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진입해야 할 지점은 너무 차갑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게 에너지가 적절히 흐르는 상온(15~25°C)의 액체 상태다. 반면 포지션이 깨져야만 하는 ‘손절점(Broken Point)’은 액체가 고체화되면서 에너지를 상실하는 ‘응고점’과도 같다. ‘목표점(Target Point)’‘은 에너지가 과열되어 기체화되는 ‘끓는점(비점)’이다. 에너지가 공중으로 흩어지며 급격히 소멸하는 지점이기에, 화살이 과녁에 닿듯 미련 없이 챙겨야 한다.
파동은 고체, 액체, 기체가 순환하듯 끊임없이 그 상태를 바꾼다. 시세가 분출된 직후에는 쏘아 올린 에너지가 이미 기체화되었기에, 다시 식어 에너지가 응축될 때까지 횡보나 조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물리적 필연이다. 과열된 공기가 서서히 식어 다시 액체가 되듯, 시세 또한 적절한 온도를 되찾아 유리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장은 끊임없이 끓고 식기를 반복하는 에너지의 거대한 바다다.
시장의 온도를 읽으면 조급함의 온도는 내려간다. 기체화되어 끓어오르는 시세 끝자락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신기루를 잡겠다는 허망한 짓이다. 에너지가 충분히 식어 다시 유연한 액체로 시세가 흐를 때를 기다려야 한다.
확률적 사고에 태생적으로 취약한 인간의 뇌로 투자의 세계에서 기다리고 대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다리기 위해서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대응하기 위해서는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원칙이 필요하다. 원칙을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지만,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비범한 영역이다. 시장에서 생존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라는 이 자각이야말로 남들과 다른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며, 시간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주가는 쉼 없이 꿈틀대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 생물을 다루는 일에 박제된 원칙은 무용지물이며, 실전의 거친 파도 앞에서 맥없이 휩쓸리기 일쑤다. 살아있는 주가를 상대하려면 원칙 또한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있어야 한다. 원칙이 자꾸만 본능의 구석으로 밀려나는 이유는 확률적 무지 때문이다. 확률은 결국 높고 낮음의 문제일 뿐, 맞고 틀림이 반복되는 과정이기에 매 순간이 다 좋을 수는 없다. ‘다 좋을 수는 없다’라는 뼈아픈 인식이 확률적 사고의 진정한 토대임을, 시간은 인내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처럼 원칙이 시시각각 살아 꿈틀거리는 상태를 ‘감각적’이라 부른다.
시장은 죽은 원칙으로 다룰 수 없는 생물이다. 감정이 목을 부러뜨리면 원칙은 마음에 걸린 박제된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에 갇힌 원칙은 살아있는 주가 앞에서 애만 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