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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을 부러뜨리는 건 터무니없는 확신이다.

by 황금지기


매번 원칙은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나는 터무니없는 확신으로 부러지게 되므로 자신의 주관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지를 깨치면서 흐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으로 만든 작지만, 단단한 자신만의 반복 패턴이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투자자는 ’손실 회피 편향‘ ’이익 보존 편향‘이란 두 마리 말을 끄는 마차를 타고 깨달음의 비탈길을 향하게 된다. 시장은 환경에 대응하는 카멜레온이었고, 나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찬 독불장군이었다. 시장의 변동성 + 인간의 터무니없는 확신 = 욕망의 무저갱이다.




매번 원칙을 부러뜨리는 건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난 터무니없는 확신이었다. 원하는 것에 성급함에 더해져서 원칙은 쉽게 부러지는 것이다. 투자자에게 있어 진짜 돈은 시나리오가 새겨진 돈이다. 손실과 이익 기준이 시나리오로 새겨진 돈이다. 잘 되었을 때와 잘못되었을 때가 비슷한 가중치를 가지며 상황이 발생하면 주저 없이 실행될 시나리오가 대범한 투자자를 만들기도 하고, 무모한 투기꾼을 만들기도 한다. 시나리오 없는 돈을 가지고 얕은 실력이 염려에서 자만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다면 그가 바로 시장이 기다리던 호구다. 파동은 등락한다는 관점으로 매매에 임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매매 횟수가 거듭되면 될수록 평균이나 손실로 수렴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평가 빈도 즉 개입이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손실을 길게 버티게 되고, 반대로 이익은 조바심에 견디지 못하게 된다. 시장에서는 대개 절묘한 개입은 절묘하게 망칠 확률과 같다. 절묘하게 기다려서 ‘절묘한 묘수가 필요한’ 상황을 되도록 만들지 말아야 한다. 절묘하게 기다렸다면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절묘하게 개입했다면 행운과 우연에 감사할 일이다. 최악의 개입은 바로 뇌동과 추격의 신호탄이 되는 ‘터무니없는 확신’이고, 개입이 잦을수록 심리적 흔들림도 잦아지게 된다.




켄 피셔의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라는 책에서 언급하듯 시장을 예측하기보다는 비슷비슷한 시장의 흐름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고만고만한 문제를 어떻게 반복해서 풀어갈 수 있는가를 고민함이 옳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반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패턴을 발견하고, ‘자기 확신’의 단계에 도달하면 취해야 할 행동이 선명해지고 두려움은 괜한 걱정거리에 불과하게 된다.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야 확률적 사고가 가능하고, 그 반복하는 마음이 공포와 의심의 반대편에 설 수 있게 해 준다. 치열한 자기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패턴을 찾아, 자신감과 누적 수익이 더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게 첫째다. 검증과 자기 확신의 과정이 있어야 기다림에 여유로움이 더해지고, 대응에도 덤덤함이 더해지게 된다. 그렇게 작지만, 단단한 자신만의 반복 패턴이 첫 번째 도미노가 되고,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부는 확장하게 된다. 시장은 반복된다. 그래서 선인들의 지혜가 가장 강력하다.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 장착된 인지적, 기술적, 사회 기술적 조건에 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기량과 성과를 엄청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문법이든, 토론이든, 금융 지식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그렇다. 무능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무능하지 않다고 더 강하게 확신하는 인지적 편향을 가리켜 ‘더닝-크루거 효과’라고 이름이 붙었다. ‘과신 효과’는 대부분 사람이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더닝-크루거 효과’는 ‘메타인지’ 능력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아는 것, 그걸 가리켜 ‘메타인지’라고 한다. 메타인지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객관화해서 보고, 자신이 그 일을 엉터리로 하고 있음을 깨닫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판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실력을 기르는 것이다.

<습관의 문법 - 강준만>


크루거와 더닝은 “능력이 없는 사람은 환영적 우월감으로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균 이상으로 평가하는 반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여 환영적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능력이 없는 사람의 착오는 자신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의 착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절망의 계곡은 인간 본성에 기인한 서정적 태도, 즉 자기 알의 세계에 갇힌 시기(투자자가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시기)다. 계곡으로 떨어지면서 탐욕과 아집은 부러지고 부러지면서 계곡의 끝에 닿을 때쯤이면 비로소 부드러워진다. 시리고 아픈 경험들로 부드러워지고서야 비탈길을 오를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의 비탈길은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이 쌓이면서 서정적 태도(주관)의 폐허 위에 객관을 세워가는 알을 깨뜨리는 시기(투자한 노력과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시기)다. 지속 가능성의 고원은 하루하루가 복리의 나날들이 새가 되어 비상하는 시기로 필연의 자만만 조심하면 되는 시기(시간을 이해하고 복리의 나날을 즐기는 시기)다. 더닝-크루거와 투자수익률 곡선이 비슷한 궤적을 형성한다는 것은 ‘투자는 심리 게임이다’라는 결론을 말해준다. 자신의 주관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지를 깨치고, 흐름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시간의 합은 투자수익률과 정비례한다.




역사를 바탕으로 확률을 추론하라. 사람들은 잊는다. 매우 많이, 매우 자주, 매우 빠르게 잊는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도 자주 잊는다. 이 때문에 투자에서 실수를 저지른다. 터무니없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 실제로 시장에서 우리는 기억에 희롱당하는 탓에,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건, 원인, 결과, 심지어 기분까지도 잊는다. 이렇게 잊는 탓에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만 외골수로 집중하는 경향이 생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근시안 행태다. 그러나 시장은 기억한다. 각각의 세부 사항은 바뀌어도 투자자의 전반적인 행태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우리는 잊는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왜 투자자의 적중률은 절반에도 못 미칠까? 결정적인 단 하나의 이유는 ‘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실수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투자자는 탐욕과 공포에 휩쓸려 실패하고 나서 ‘탐욕과 공포에 휩쓸리면 실패한다’라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또다시 탐욕과 공포에 압도당한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탐욕과 공포가 과거에 얻은 교훈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교훈은, 인간은 좀처럼 배우거나 변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시장에서 기법은 낙엽만이 뒹구는 황량한 거리에서 걸쳐 입은 얇은 겉옷에 지나지 않는다. 차가운 거리에서 얼어 죽지 않을 든든한 외투는 자신의 심리와 조화를 이룬 베팅의 기술이다. 때를 기다리고, 시장에 맡기면서, 반복하는 마음이 베팅의 기술이며 이 마음은 ‘부드럽고 섬세한 물과 같은 선량함’에서 움튼다. 치열한 검증과 자신 확신으로 신념화된 구간, 손실 rule, 횟수의 최소화로 비겁한 승자(a cowardly fighter)가 되어야 한다. 절대 파산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잃어도 상관없는 돈으로 기다리다 기회가 포착되면 매섭게 몰아붙이는 승자, 승부를 볼 때도 초조해하지 않고 오히려 덤덤하게 밀어붙이고, 재미를 볼 때는 여유롭게 던지는 그런 비겁한 승부 근성이어야 한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말, 조금만 고개 숙여도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말이 옳다.




투자자는 ‘손실 회피 편향’과 ‘이익 보존 편향’이란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깨달음의 비탈길을 향하게 된다. 비탈길이 시작되는 양옆으로 펼쳐진 절망의 계곡에는 뇌동과 추격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조금만 방심해도 말들은 비탈길을 벗어나 우거진 숲으로 마차를 끌고 간다. 자꾸만 어긋나 숲길로 향하는 말들을 다스리면서 길들이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노력에도 마차는 좀처럼 비탈길을 오르지 못한 채 애만 타들어 간다. 성급함과 서두름과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해 어두컴컴한 밤길은 쉬면서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낮에만 천천히 마차를 몰면서 말들을 다스려야겠다. 등락의 관점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근거 있는 진입을 반복하는 작은 습관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기다림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불쑥 고개를 쳐드는 근거 없는 확신과 근거 있는 진입 이후에도 여지없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지껄이는 터무니없는 확신이다. 이 두 가지 확신은 투자하는 마음에 기생하면서 언제나 주인 행세를 하는 지독한 쌍둥이 사생아다.




시장은 환경에 따라 대응하는 카멜레온이었고, 나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찬 독불장군이었다. 반의반 박자. 반 파동만 빠르거나 늦추면 만사가 편해지고 누적이 쌓이지 않을까? “그는 지지저항 대에서 챙기고 진입하는 노력을 개의치 않았고, 써먹지 않은 지지저항 대를 두려워하면서 힘겨운 감성 노동을 반복했지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말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터무니없는 확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딱 부러지게 맞추는 건 대단히 어렵다. 그것도 반복해서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투자는 근사치를 추정하고, 흐름에 따라 보완해 가는 게임이다. 대부분 추정·보완의 수고로움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확신에 가까운 단번에 맞추려는 무모한 시도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만다.




개인투자자의 파생 실패율은 99.7% 이상으로 봐야 한다. 「돈의 시나리오」에서는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고 부를 이룬 사람을 3%라고 보았다. 주식시장을 이해한 3%를 선물 시장의 범주로 좁힌다면 0.3%라도 될까? 1,000명 중의 3명만이 성공한다면 절망적이겠지만, 거꾸로 우리나라 5,000만 명으로 놓고 보면 15만 명이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이 반 정도 담겨있는 컵을 놓고 반밖에 없다고 보거나,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 인식의 차이겠지만 지독하게 어려운 고행의 길임은 분명하다. 투자는 심리 게임이고, 자기 세계를 깨뜨려야 하는 필연의 깨달음의 과정을 요구하기에 제대로 된 체계적인 훈련도 중요하겠지만 인문학적 소양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장에서 보통의 노력 정도로는 대부분 실패하고, 노력의 정도와 기간은 성공과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기법의 정립은 단지 기본 사항일 뿐이고, 자기 검증과 확신의 치열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법은 신념이 되어야 한다. 시장의 변동성 + 인간의 터무니없는 확신 = 욕망의 무저갱이다. 터무니없는 확신으로 인한 위험과 실수의 여지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신념화된 기법이 수익을 우상향하도록 기계적으로 되어야 한다. 또한 쓰지 않아도 되는 돈’으로 원칙을 여유 있게 지킬 수 있는 여유로운 자금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곳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며, (자만은 전설적인 투자자마저도 자살로 이끌었다) 이곳에서 성공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깨우침의 과정이다. 어렵고도 어려운 또 하나의 세계로 향하는 길임은 분명하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에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실패의 또 다른 한 축은 자본주의 시장과의 인지부조화였다. 강세장이 약세장보다 길고, 손실률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기에 자본주의는 우상향했지만, 앞으로도 인간의 이윤 추구 욕구와 그에 따른 필연적 기술의 진보 관점에서 우상향에 베팅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없이 본성은 하락 방향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잘못된 가치관에서 자란 익숙함은 참으로 떨치기가 어려웠다. ‘선량함’이 모자란 지독한 부조화였다. 내게 밤은 세이렌과의 동침이었다. 어둠이 내리면 의지는 생기를 잃었고, 그렇게 하루의 의지가 수명을 다하면 ‘인간 본성의 기본값’ 욕망은 무시무시한 하이에나의 눈빛으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욕망의 부추김에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난 확신은 짧은 순간 들불처럼 번지며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에게 어둠은 치명적이었다. 이미 의지는 잠들어버렸고, 욕망의 육체만이 남았다.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인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밤의 사악한 정령들이 찾아왔다. 불행하게도 밤이 깊어질수록 창녀촌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들보다 더 강렬한 변동성은 세이렌이 되었다. 밤은 의지를 충전하고, 감각을 북돋우는 정신적·육체적 낙원이어야 한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들 속으로, 어쩌면 무(無)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이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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