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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기본은 투자하는 마음이다.

by 황금지기

파동은 흔들리고 끊임없이 변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기다리고 대응하는 투자의 기본은 투자하는 마음이다. 확률의 게임이란 건 반복의 게임과 동의어, 반복이란 지루함을 견디면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상태에서 알을 깨는 자가 니체의 초인이다.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보내면서 맡기는 시장과의 조화 그 원칙이란 배를 띄우면 그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원칙에 의한 전술적 기다림에서 이미 결과는 결정된다. 실수의 여지를 간과하지 말고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탐욕과 원칙을 등가교환 해야 한다.




기초부터 알기, 그것이 그레이엄 코치가 우리에게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기초, 기초, 기초,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학생이 손해를 보면서도 이 점을 무시하는 것을 보아 왔다. 당신은 반드시 기초부터 제대로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화려한 것들도 해낼 수가 없다.

<마지막 강의 – 랜디 포시>

투자에 있어 기초 중의 기초 두 가지는 아마 이러할 것이다. 첫째는 자신이 확률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유리한 방향으로 근거 있는 진입을 기다리는 습관일 테고, 둘째는 손실을 짧게 끊어내는 대응하는 습관일 것이다. 정한 자리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지속 가능함이, 자르면서 대응하는 마음에서 꾸준함이 움트게 되므로 투자의 기초 중의 기초, 기본은 투자하는 마음이다.




베아트리체 시절의 저 몇 주일, 몇 달의 다정한 안정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나는 그때 하나의 섬에 도달했고 평화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그랬다. 하나의 상태를 좋아하게 되자마자, 하나의 꿈이 편안해지자마자 그것은 어느새 벌써 시들고 흐려졌다. 부질없다. 그 뒷모습을 보면 탄식함은! 나는 이제 가라앉지 않는 욕망, 팽팽한 기대의 불 속에서 살았다.

<데미안>

이렇게 인간의 감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은 어찌하기 힘든 일이다. 파동도 생물이기에 인간처럼 흔들리고, 끊임없이 변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파동이 끊임없이 지껄이는 좌뇌의 속삭임과 시장의 끝없는 조롱이 나약한 인간의 막연한 기대에 불을 붙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과거에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똑똑한 척하는데 온통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고, 똑똑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배워야 함을 깨쳐서 익히지도 못했고, 그나마 배우고 경험한 것들조차도 기억하지도 못했기에 똑같은 행태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주식시장처럼 그렇게 반복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투자는 확실성이나 가능성의 게임이 아니라 확률의 게임이다. 변동성은 자체이며 그 자체로 변동적이다. 주가는 등락하기 마련이다. 피할 수 없다. 변동성은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지만 주식시장이 크게 흔들린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주식시장은 오늘날 요동치고 있고,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아멘.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확률의 게임이란 건 반복의 게임과 동의어다. 확률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확률에 수렴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게임의 법칙이고, 이건 중학교 통계 수업에서 배웠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고, 맞추는 게 아니고, 어떻게 땄느냐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배우고 배워도, 그런데도 원칙이 반복되지 못하고 자꾸만 부러지는 건 왤까? 그건 분명 자기 세계에 아직 갇혀 있어서다. 모든 패턴은 수렴하면 터진다는 것이고, 고점이 높아지면 상방으로, 낮아지면 하방으로 다시 저점이 높아지면 상방으로, 낮아지면 하방으로 향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명백한 사실을 단순하게 여러 형태의 그림으로 나타낼 것일 뿐이다.




역사는 예측으로 가득하며 대부분 틀렸다. 투자자가 장기 예측을 시도할 때 저지르는 근시안적인 실수도 이와 똑같다. 그들은 현재의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장기투자를 하는데 그 가정은 바뀔 수 있고 급변할 수도 있다. 위험한 건 지지 자체가 아니라 프리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을 희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무엇을 예상하는지, 그리고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그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중요하다. 내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사람들이 예상하는 일은 드물게 발생하며, 발생하더라도 사람들이 흔히 믿는 것과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진다. 순전한 우연이거나. 투자는 확실성이 아닌 확률의 게임이며, 당신은 어떻게든 합리적인 확률을 산정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당신의 이해와 분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가끔 ‘틀릴 수 있다’라는 것이다. 자주 틀릴지도 모른다. 시장에 대한 당신의 기억이 형편없다는 것을, 직접 겪은 역사일지라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돈과 시장은 절대 잊지 않지만, 사람들은 반드시 잊는다. 이번에도, 다음에도, 당신 삶의 언제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지루함을 견디면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상태에서 알을 깨는 자가 니체의 초인이다. ‘기계적’은 시장에 맡기는 마음, 즉 원칙에 맡기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며, ‘서정적’ 태도라는 인간 본성의 알을 깬 상태이며, 아브락사스(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의 꿈을 찾고,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고, 생각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진정한 자아를 찾으면 '아브락사스'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로 가는 길이다. 시장은 끊임없이 등락하면서 반복될 뿐이다. 투자는 반복의 공식을 찾아 기계적으로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게임이다. 등락을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우상향하는 시장처럼 반복하면 결국에는 누적 수익은 우상향 그래프가 된다. 본성의 이끌림에 따라서 시장의 방향을 맞추고자 하면 정신은 피폐해지고, 육체는 병들게 된다. 거대한 물줄기를 따라가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상태가 아브락사스에게로 가는 길이다. 뇌동과 추격의 방탕한 생활을 멈추어 줄 나만의 베아트리체를 찾아서 헤매던 어느 날 낮잠에서 「데미안」에서 살고 있던 그를 직접 보았다. 그 몸의 절반은 내 머리털 속에 박혀 있었는데, 커다란 알에서부터인 듯 땅덩이에서 나오려고 푸른 하늘 바탕 위에서 애쓰고 있었다. 그날 이후 파동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를 볼 때면 그때 그 형상을 마주하게 된다. 거대하게 흐르는 강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서정적 태도로 둘러싸인 머릿속 땅덩이에서 나오려고 애쓰는 머리털 위로 그의 몸뚱이를 보게 된다.




횡보장으로 보고 체념하면 추세의 시작점이고, 강하게 가겠구나! 흥분하면 횡보장이다. 언제나 그렇듯 투자자의 아직은 ‘벌써’고, ‘벌써’는 아직이다. 항상 수렴의 끝자락에서 시세가 나고, 꼬리가 전체를 좌우하는 게 시장이기에 최고의 방법은 기계적인 매매다. 인간의 뇌에 내재한 편향을 고려했을 때 시장에 맡기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야 편하게 반복할 수 있다. (선량함, 물, 부드러움, 섬세함, 운, 실력, 심성, 탐욕, 아집, 결과, 과정, 공부, 우연, 조화, 필연, 습관, 경험, 천형, 무저갱, 악마의 목소리)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나는 터무니없는 확신과 탐욕 그리고 아집에 갇히게 되는 나만의 세계라는 서정적 태도에서 세상과의 조화를 향해 비약해야 한다. 아무도 모른다. 생각은 돈과 시간 그리고 심리 낭비다. 부질없이 생각으로 맞추려 들지 말고, 원칙으로 정한 물줄기 위에 배를 띄우면 그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단순하게 손익이 50% 확률 같지만, 선물과 같은 양방향 게임에서는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서 누르는 압박으로 인해 97% 이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특히 양방향 게임에서 투자자는 흡사 손실 회피 편향과 이익 보전 편향이라는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 인간 본성에 생존의 필수 프로그램으로 장착된 이익 보전 효과 편향과 본전 심리는 이익은 짧게 가져가게 하고, 본전과 전부 잃을 확률을 같게 만드는 대표적인 도박적 사고다. 이러한 편향으로 수익을 쌓아가기는 대단히 힘들고, 반대로 손실 회피 편향으로 손실은 쉽게 쌓이게 된다.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가져가도록 이러한 편향을 극복하는 게 누적의 첫째 조건이 되고,


역시 필수 프로그램으로 장착된 막연한 기대에 기인한 추격과 뇌동으로 매매 횟수가 증가하고 적은 손익에 연연하는 평가 빈도 즉 개입이 잦아질수록 손실이 커지는 게 시장 구조다. 손실과 수익이 두 배의 영향을 미치게 되는 양방향 게임에서 주관적인 세계에 갇히게 되면 터무니없는 확신으로 인해 이익이 나야 할 구간에서 손실로 마무리하는 이중의 손실 구조가 된다. 확실한 자리는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므로 애매하고 어려운 자리를 보낼 수 있도록 ①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난 것들에 꽂히게 되는 확증 편향, ② 돈이 부족해서 돈을 따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뇌동하게 되고, 돈을 잃어서 본전을 찾아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추격하게 되는 동기에 의한 추론, ③ 좋은 쪽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면서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본능에 기인한 낙관적 편향과 같은 터무니없는 확신을 극복하는 게 누적의 둘째 조건이 된다.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애매하면 보내면서, 시장에 맡기는 그 마음’이 시장과의 조화다. 결국에 이 길은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극복해 가는 인간력의 게임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는 게임이 되는 구조’ 편향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에게 양방향 게임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Self Risk(편향적 존재), Flat Risk(횡보하면서 유혹하는 파동), Trap Risk(끝없이 함정을 파는 파동)를 이겨내고, 실수의 여지를 줄이면서 누적을 쌓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돈에 쫓기면서, 그래서 돈을 좇는, 억지로 돈을 벌려고 하는 터무니없는 행위가 뇌동이자 추격이다. 시장에서 돈은 도망 다니는 개와 같고, 주가는 끈에 묶여 있는 개와 같다. 원칙으로 정한 선이 진짜 돈, 즉 주인이고 돈은 개와 같아서 좇아가면 도망간다. 주인의 마음으로 원칙으로 정한 선에 서서 돈을 기다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이유는 가진 돈의 여유로움의 차이 때문이다. 도망 다니는 개를 좇아가는 돈이냐!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주인이 되어 기다리는 돈이냐! 전술적 기다림에서 게임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버린다. 돈 자체가 여유롭지 못하면, 결코 그 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올가미는 더 조여들면서 돈의 노예가 된다. 그렇게 모든 걸 잃게 되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돈을 좇아가면 도망간다는 걸 알면서도 악마의 목소리를 따라서 돈을 좇아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 본성적 편향을 극복하는 게 투자자의 몫이다. 여유롭지 못한 돈은 뇌동을 부르고,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돈도 뇌동으로 향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는 법이기에 투자는 여유롭고 덤덤한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있지 않으면, 흔들리는 파동에 흔들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유행가 가사처럼) 나는 나밖에 몰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뇌동과 추격을 일삼고, 시장은 언제나 파동대로 갈 뿐이기에 우리는 평행선. 그래서 투자자는 캄캄한 미래를 헤매게 되고, 시장과 끝없는 평행선을 걷게 된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면, 그렇게 원칙이 무너진다면, 아직 시장에서의 소중한 꿈을 부여잡고 있어도, 캄캄한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고’ 시장과의 틈새는 좁혀지지 않고 끝없는 평행선을 걷게 된다. 원칙에 입각한 기계적 반복 과정을 통해 시장과의 틈새를 줄여가는 길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인간의 자만이 참 치유하기 힘든 값비싼 병이듯이, 인간의 나밖에 몰라서 아집의 동굴에 갇히게 되는 것 또한 참으로 지독한 병임을 투자자는 시간을 통해 배우게 된다. 물론 소중한 돈을 잃어가면서 깨치게 되겠지만, 그만큼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므로 전반적인 삶을 놓고 본다면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이다. 투자는 자신을 버려가는 과정이자 자신을 알아가면서 성찰하게 되는 과정이다.




“등가교환, 이것만 기억해 놓아, 등가교환 나의 귀중한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으면 그걸 얻을 수가 없어.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방송인 김혜자>

양방향 게임에서는 (+) (-)가 동일 선상에 있고, 결과에 따라 배수의 차이가 존재하게 되므로 수익보다는 잃지 않는 게 훨씬 중요하다. 잃지 않기 위해서는 실수의 여지가 증가하는 애매하거나 어려울 때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일단 잃게 되면 잃을 확률이 월등해지고, (-) 상태에서는 다음 선택의 질 또한 확연해지므로 복리는 잃지 않는 것을 토대로 한다. 실수의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단순화해야 하고, 실수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애매하거나 어려우면 보냄으로써 매매 횟수와 시간을 줄여야 하고,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서 어깨를 과도하게 누르지 않도록 leverage를 줄여야 하고, 손실을 칼같이 자름으로써 손실의 무게에 어깨가 처져서는 안 된다. 실수의 여지를 간과하지 말고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탐욕과 원칙을 등가교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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