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와 함께
p230
때로는 마주 보고 있을 때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뭐든 말하기가 편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자아는 정말 이상하다. 자아는 혼자인데, 혼자서는 견딜 수 없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강은성은 자아(대표적으로 성정체성)를 기댈 대상인 가족들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번번이 자아를 부정 당한다.
누나인 강은진의 자아는 엄마를 닮아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도 엄마와 동생 사이에서 붕 떠 있고, 가장 독립적인 그들의 엄마, 김미승의 자아는 몰래몰래 옛 연인 양병진에게 기대곤 하는 나약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아의 독립이란 불가피하면서도 불가능하다. 남들에게 부여된 자신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금세 외로워지는 것이다.
심지어 자아의 독립이란 아예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상 강하고 행동력 넘쳐 보이는 김미승과, 그녀로부터 강요된 강은진의 강은성에 대한 자아 의탁은 진정한 자아 상실이다.
소설은 철저하게 공성표라는 가명 속에서 강은성을 제외시키며 전개된다. 데뷔작부터 칸 영화제에 입성하며 대단히 성공한 배우 공성표(본명 : 강은성)의 묘연한 행방은 철저하게 누나, 엄마 등의 주변 인물을 통해 서술되며, 심지어 이 소설은 엄마의 옛 연인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주 멀리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결국 나중에 등장하는 공성표의 내밀한 속마음마저 인터뷰 형식을 차용하여, 결국 공성표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진다. 소설 전개 방식 자체가 겹겹이 포장된 주인공의 자아를 끊임없이 뜯어내는 느낌이다.
그 포장 끝의 강은성은 아마 아무도 영영 모를 것이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강은성 스스로도 말이다. 강은성은 이제 막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읽지 않아도 되는 부록 : 잊혀지는 여성)
공상표의 동성애 전조에 대해 ‘여성스러운’ 행보로 표현함은 일부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읽는 독자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다. (부록의 부록; 공상표가 남자로서 아기자기한 물건을 좋아하거나 치마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는 남성이 아니게 되는가? 아기자기한 물건을 좋아하지 않거나 바지만 입는 여성은 여성이 아니게 되는가?의 의문. 공상표의 동성애는 남자와 남자의 것인데 어째서 한쪽을 여성스러움으로 규정하여 이성애의 관계성으로 귀결시키는가, 혹은 어째서 표현에서조차 스스로의 속성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 번 부정하는가.)
물론 이 부분을 작가의 생각으로 치부함을 여러 곳에서 주의 받는 독서이다. 게다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이러한 표현은 강은성을 부정하는 강은진의 생각이므로. (부록의 부록의 부록; 하지만 왜 본인인 강은성조차 게이스러움을 여성스러움으로 정의하는지는 의문)
p193
게이 같다는 건 뭘까요?
공상표 : 여성스러운 거죠. 말투도 몸짓도 목소리도 왠지 모르게 좀 남자답지 못한 거죠.
여성들이 남성의 동성애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애초에 보통 남성 퀴어 콘텐츠는 여성이 먹여 살린다고 본다. 남성 소비자를 염두하는 시각임에도.) 그건 여성이 완전히 배제된 사랑은 보는 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여느 때보다 느긋하게 사랑을 감상한다. 우리는 내 사랑이 보고 싶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 대신 갈등과 절정을 반복하는 남의 사랑은 언제나 재미있다. (불난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안심이 되는 법)
하지만 남성의 동성애가 주제이자 주인공이 되는 소설 속의 동년배 여성은 보기가 괴롭다. 그들은 보통 왜곡되거나 억압당하는데, 그건 역시나 앞서 언급한 ‘게이스러움=여성스러움’으로부터의 피해일 것이다. 게이가 본인을 부정하거나 주변으로터 부정당할 때, 여성도 자연스럽게 부정당하는 것은……(음, 뭐랄까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떠오르는데 적기가 싫다.) 물론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사람을 기대하는 것은 사랑의 고난 앞에서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강은성의 ‘여성스러움’을 속단하기 위해 버려진 강은진의 ‘인형과 장난감, 학용품 일체’가 떠오르는 것까지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