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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피아니스트의 전설 (1998)

유한에서 무한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이에게 무한의 세계란?

by 육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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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end1.jpg 피아니스트의 전설 La leggenda del pianista sull'oceano THE LEGEND OF 1900 (1998)

이 영화의 제목에는 '전설'이 들어간다. 위인이라는 의미도 될 것이고,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story라는 의미도 될 것 같다.

나인틴과 함께 버지니아 호에서 연주를 하던 트럼펫 연주자 '맥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아는 사람은 없다. 맥스의 말이 거짓말 취급당하기도 한다. 맥스의 이야기 속 나인틴조차도 자신이 버지니아 호에서 생을 시작하고 마감한다는 것을 맥스 당신 하나만 알아주면 그걸로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인틴 그는 천재다. 피아노만 잘 쳤던 게 아니라 관찰력과 통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뭐든 쉽게 배우는 사람, 쉽게 배우고, 모든 것을 기억하며, 모든 자극에 반응하는 사람. 또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 적은 input으로도 많은, 혹은 input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output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다시 보니 그것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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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을 배 안의 환경에서도 글을 읽고, 글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을 자신의 양부에게 묻고, 양부가 적당히 우스갯소리로 대답해 준 것을 모두 기억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습득하는 모습.


뉴올리언스를 가보지 않고도 그곳 겨울의 아름다움에 대해 완벽히 묘사하는 모습.


언제나 새롭고, 훌륭한 곡을 연주해 내는 그에게 맥스가 묻는다, 그 영감은 어디서 오느냐고.

나인틴은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얼굴들 뒤에 있는 개인의 성격과 사연과 역사를 상상 또는 짐작하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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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인틴의 명성을 들은 젤리 모턴-재즈를 발명했다는 남자-이 나인틴과의 피아노 배틀을 위해 배에 탑승한다. 그가 멋지게 재즈를 연주하고 나면, 나인틴의 차례다.


첫 번째 대결에서 나인틴은 크리스마스 캐럴로 답한다. 다들 비웃는다.


두 번째 대결에서 나인틴은 상대가 조금 전에 연주한 곡을 완전히 그대로 따라 한다. 그 또한 천재성은 맞지만 음악 배틀에서의 완벽한 모사(模寫)란 조금 부끄럽다.


그렇게 모두의-심지어 맥스조차도- 기대가 바닥에 떨어진 세 번째 대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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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초반에 젤리 모턴이 담배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피던 담배를 피아노 위에 걸쳐두고 그 담뱃대가 모두 타들어가기 전에 끝냄) 세 번째 대결을 할 때 나인틴은 자기 차례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피아노 위에 걸쳐두고, 앞선 모든 연주를 뛰어넘을 연주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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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넋이 나간 순간, 나인틴은 내내 피아노 위에 있던 담배를 집어 들어 열연으로 달구어진 피아노 줄에 갖다 대어 담뱃불을 붙여 젤리 모턴에게 건넨다. 나인틴은 그 퍼포먼스까지 모두 관찰하고 기억하고 더 훌륭하게 변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대사도 거의 없지만 상징적인 인물은 파도안(퍼든)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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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안(퍼든)

나인틴이 자신의 연주를 녹음하기로 한 날, 연주와 녹음을 시작했을 때 밖에 서 있는 퍼든 양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런 퍼든 양을 바라보며 연주한 곡이니 절절한 사랑의 선율이 담긴 음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퍼든 양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릴 사람이기도 하다.


퍼든 양의 주변을 맴돌다가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의 대화를 듣고 알게 된다. 그녀는 몇 년 전에 만났던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이라는 걸.


그 이민자는 자신의 세상에 갇혀 지내다가 가족도 잃고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신에게 아직 남은 가족인 막내딸을 위해 움직이기로 결심했고,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인생은 광대하니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 그렇게 새 출발을 했다고. 그를 움직이게 한 그 막내딸이 퍼든 양이다.


처음 그 이민자와의 대화를 볼 때는 나인틴도 그 사람과 비슷한 캐릭터라서 비슷하게 갇혀있다는 암시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민자는 자신의 딸(퍼든)을 사랑했기에 움직였을 터이고, 나인틴도 퍼든 양을 타인의 입장에서 사랑하게 되어 배에서 내리겠다고 결심한다. 같은 대상을 보며, 사랑을 느꼈고, 갇혀 사는 듯한 두 사람은 나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두 남자를 결심하게 만든 여자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러니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라는 흔하지만 진리인 그 말이 생각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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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틴은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그 이민자처럼) 세상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땅을 디디기도 전에 다시 배로 돌아온다.


왜였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나는 그가 겁쟁이이고 비겁해서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이민자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나의 감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사람과 나인틴은 아예 다른 사람이다. 즉, 사랑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천성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인틴은 천재였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관찰력과 통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나고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배우는 사람, 어쩌면, 모든 자극에 반응하는 사람.

그는 의미 없는 '왜?'라는 질문을 하며, 겨울에는 여름을 여름에는 겨울을 기다리는, 항상 멀리 있는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범인(凡人)들과는 다르다. 그는 지금 있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과연 배 밖의 세상이... 필요했을까?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고, 원했을까? 그리고 그걸 감당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 혹은 성공이나 돈을 전혀 원하지 않고도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사람에게, 유한한 88개의 건반으로 무한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에게, 평생을 배에서 태어나 땅에 발 한번 딛지 않고도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사람에게, 무한의 세계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신이 그 무한의 세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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