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6
흔히 육아를 하다 보면 이성의 끈을 놓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한다. 나의 아이는 아직 50일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최대로 나를 건드릴 수 있는 건 잠투정밖에 없기 때문에 아직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본 적은 없다. 하지만 ‘원더윅스*’로 추정되는 기간에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칭얼거릴 때는 단단하게 쥐고 있던 끈을 조금 놓을 뻔한 적도 있었다. 사실 아기의 입장에선 어둑하고 조용한 배 속에서 안정적으로 먹고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험하게 된 밝고 시끄러운 바깥세상은 별천지로 느껴질 것이다. 이걸 알기 때문에 내 안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 때마다 참으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아마 아이가 힘이 세지고 의사 표현을 하게 되면 좀 더 힘들어지겠지.
*원더윅스: 아기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육아의 입장에서는 더 많이 울고 보채는 과정에서 부모를 가장 힘들게 하는 때를 말한다.
내 아이는 태어나서 최근까지도 순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와 남편뿐 아니라 우리 엄마까지도 이런 아이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며 자신했다. 시간에 맞춰 밥 주고 기저귀만 갈아주면 아이는 잘 자고 잘 쌌기에 속으로 ‘육아할 만한데?’라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내 생각을 엿듣고 반박이라도 하는 듯 얼마 전 재우면 십 분 뒤 깨서 울기를 하루종일 반복한 적이 있다. 처음엔 ‘그래, 지금까지 너무 쉬웠어. 이래야 육아지!’라고 생각했지만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뭘 해도 아이가 깰까봐 조마조마하게 되자 점점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오후까지 같은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아이가 있는 안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고함을 쳐 버렸다. 평소 내가 분노의 역치가 낮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편은 나와 아이를 분리시켰고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다독였다. 귀가 얼얼한 울음소리에 다시 이성의 끈을 잡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육아를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한 겨우 50일이기에, 또 내가 엄마니까 꾹 참고 다시 아이를 보러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안아 든 아이가 갑자기 나를 보고 갑자기 씨익 웃는 게 아니겠는가? 사실 이 시기의 웃음은 사회적 웃음이 아니라고 한다. 이때의 웃음은 배냇짓이라고 하여 근육이 당겨 습관적으로 웃는 표정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즉 분위기를 파악하고 화난 나를 풀어주기 위해 짓는 웃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짜 웃음일 수 있는가? 분명 나를 보고 웃는 게 맞는데 말이다. 아이의 웃음을 보고 나니 아이보다 30년 이상 더 산 내가 감정하나 다스리지 못했다는 게 부끄럽고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그래서 곧바로 다시 이성을 되찾고 아이를 다독이게 되었다. 다독이며 생각했다. 분명 아기의 저 웃음은 미성숙한 아기가 나 같이 마음이 넓지 못한 부모에게 버림받을까봐 신이 ‘생존 무기’로 만들어줬을 것이라고. 먹고 자고 싸는 것밖에 못하는 아기들에겐 분명 살아남기 위한 생존 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말 신이 그런 의도로 만들었다면 아기의 배냇짓은 신의 걸작이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스스로가 죄인으로 느껴질 만큼 아기의 웃음은 청정무구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웃음은 나를 보고 좋아서 짓는 게 아닐지라도 엄마의 마음을 녹이기엔 충분했다.
오늘도 나는 아기가 가진 생존 무기에 무너진다. 힘들어도 내가 참아야지. 저 웃음엔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