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준비하는 마음
겨울 강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는 입춘, 우수도 지났다. 그런데 어제부터 흩날리던 눈이 밤새 온 세상을
하얀 이불로 덮어버렸다. 마치 한겨울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겨울이 뭔가 아쉬워 막바지 시샘을 하는 걸까. 아직은 2월인데 절대적인 자연의 질서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겨울왕국처럼 내려주는 눈이 내 삶의 길목에서 봄을 미리 준비하라고 주는 예시 같은 선물일지도.
몸과 마음이 잠깐 이완되는 시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시간은 언제나 여유롭다. 같이 동행한 지인 중 한 명이 요즘 나의 일상에서 구멍 나 있는 부분은 없냐고 물으신다. 구체적으로 요즘 일상에 힘든 점은 없는지 물으신 것 같다. 요즘 복잡한 내 심경을 그 분은 그새 눈치 채고 계신 걸까. 예를 들어 남편, 자녀, 직업 등에 관한 고민이 있는가를 다시 질문하셨는데, 망설임이 응답했다. 전부 다 라고.
온 세계가 마치 자신의 놀이터인양 천방지축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인 딸, 요즘 전형적인 MZ 세대 진열에 선두를 달리고 있는 아들이 그랬다. 또 나의 요즘 상황조차도. 저녁에 남편과의 산책길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한참 듣고 있던 남편이 “엄한 나한테까지 불똥이 튄 거냐”며 서운하다는 눈치다. 남편까지 고민거리에 모조리 몰아버렸으니까. 미안했다. 나를 위로해 주고, 최대 지원군은 남편이었는데...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장을 펴 놓고 한참을 끄적인다. 그냥 걱정거리를 달고 살았는데, 하나씩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그 끝에서 나를 발견했다. 그렇다. 내 생활에 구멍 난 부분 중 제일 큰 부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걸 왜 지금서 깨달았는지. 내 인생인데 주인공처럼 살지 못한 그런 감정이 밀려오면서 외로움으로 슬며시 밀물처럼 다가왔다. 그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 고립되거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많아서 발생하는 감정은 아니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한 것도 큰 원인이 아닌가.
흔히 나이 오십이 넘으면 인생 절반이 지났다고들 한다. 반백 살, 아마도 백세 기준으로의 의미이리라.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있겠지만, 다른 방향으로는 변화하기 시작하는 일종의 변곡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에게도 인생의 오후가 시작된 지는 한참 되었다. 몸도 건강하고 전문성도 최고점인 지금, 나의 가치는 그대로이고, 마음도 아직은 청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회는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보는 나의 가치가 급락한 듯하니 스스로 가치와 큰 차이가 생겼다. 모르겠다. 혹시 이것이 현실과 이상의 거리일지도.
요즘은 많은 고민을 마음에서 꺼내 글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의 문이 열렸고, 적지 않게 변화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멀었나 보다. 어쩜 난 지금껏 무지개만 보길 꿈꾸었던 건 아닐까. 이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잘 견디고, 순리와 순응의 자세로 잘 참아 내리라. 아니 비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비를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궂은 비, 늦은 비, 이른 비도 나름대로 단비가 될 것이다. 흐린 날씨에도 잘 참아냈을 때, 어느 순간 환하게 선보이던 무지개는 얼마나 찬란했던가.
계절의 길목에서 다시 눈길을 걸었다. 가슴 뛰는 오늘을 위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해 보면서. 남을 탓하기보다도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도. 설사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조금 늦춰지면 어떠하랴. 잠시 여러 일이 진행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봄이 멀지 않은 이 길 위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우선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나름대로 고유하게 지속될 나다운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므로.
24년 2월 끝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