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불안, 오래 남은 감사

사랑은 거리를 모른다

by 박경이


그날의 평온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깨졌다.


성악 수업을 마치고 지인과 함께한 점심은 참으로 따뜻한 시간이었다.
노래로 호흡을 맞추던 여운이 아직 목 안에 남아 있었고,

식탁 위에서는 웃음이 자연스레 번져갔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우리는 잠시 삶을 내려놓은 사람들처럼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은 마치 삶이 잠시 쉬어가라고 내어준 작은 쉼표 같았다.


밥을 한 숟갈 뜨려는 순간, 호주에 있는 딸냄의 블로그 알림이 휴대폰 화면 위로 떠올랐다.

호주에서는 좀처럼 블로그를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ᆢ
그래서인지 그 알림은 유난히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글을 올렸을까, 괜스레 기대하는 마음으로 화면을 열어 내려갔다.




몇 분 상간으로 연달아 두 개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의 평소 글과는 결이 달랐다.
가방, 쥬얼리, 낯선 홍보 문구들.
마치 아이의 목소리를 빌린 낯선 사람이 대신 말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 거기서 이런 알바도 하나?’

코멘트를 달려 했지만, 댓글 창이 막혀 있었다.
가볍게 넘기려던 마음은 곧 멈춰 섰다.



그래도 그래까지는 의심 없이 딸아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00아, 왜 댓글 막아놨어? 엄마가 댓글 좀 달아 주려 했는데ᆢ”





잠시 후 돌아온 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 모든 상황이 담겨 있었다.
“엄마… 내가 쓴 글 아니야. 해킹당한 것 같아.”


그 순간, 식탁 위의 따뜻함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방금 전까지 쉼표 같던 시간은 순식간에 느낌표로 바뀌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또 있었다.
딸아이가 해외에 다시 나가면서 휴대폰 사용을 줄이기 위해 며칠전 알뜰폰으로 변경을 했단다. 그 가운데 활성화가 되지 않아 인증이 막혀 있던 상황이라고 했다.
순간, 며칠전 거기서 인터넷 서점 e북을 신청하려다 인증이 안 된다 해서 대수롭지않게 생각하며 내가 카톡 선물로 보내준 일이 떠올랐다.



해킹에, 인증 불가에, 연락의 제한까지.
마치 한 번에 몰려온 파도처럼 상황이 겹겹이 쌓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그날만큼 또렷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을까.


지인은 내 표정을 보고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이것 저것 정보를 발빠르게 찾아보기도 하고, 자신의 며느리에게까지 전화해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전쟁을 치르듯

네0버 고객센터와 통신사 고객센터를 오가며 동분서주했다.


전화 연결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고,
설명을 반복하는 목소리는 점점 조급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보이지 않는 어디선가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주는 손길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엉켜버린 실이 누군가의 조용한 손길에 의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결국, 두 가지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네0버 임시 번호를 발급받아 인증을 마치고,
아이의 블로그에 올라온 낯선 글들은 모두 삭제되었다.


“다~엄마 덕분이야.

엄마가 바로 확인 안 했으면.....

으~~”


아이의 답이 건너왔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안도의 숨과
멀리서 전해지는 고마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생각해보면 분개할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일상을, 누군가의 공간을 이토록 가볍게 침범한다는 것.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감사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긴박했던, 건 한 시간의 순간 속에서도
모든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풀려갔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때로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함을 배우는 일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알았다.
사랑은 거리를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도는 국경을 묻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은 종종 큰 소리로 우리를 위협한다.
문제는 늘 과장된 그림자처럼 다가오고,
두려움은 실제보다 더 크게 몸집을 부풀린다.


그러나 믿음은 다르다.
아주 작게, 아주 조용하게 시작된다.
마치 식탁 위에 놓인 한 숟갈 밥처럼 소박하지만 분명한 온기를 가지고.


우리는 종종 삶을 거창한 사건으로 기억하려 한다.
하지만 진짜 삶은 이렇게 아무 일 없던 하루의 식탁 위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밀려오는 평안 속에서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멀리 있는 딸의 하루와 가까이 있는 나의 일상이 같은 은혜의 선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다.



마치 삶이 내게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다.
두려움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고,
우리를 지키는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