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벗 #3 책

by 해이나

하루 종일 책을 읽는 걸 좋아하던 아이였다. 특히 비가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삶은 고구마를 먹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책들은 고구마 껍질로 범벅이 되곤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구석에 숨어서 읽는 것을 좋아했다. 어둑어둑한 책상 밑에 들어가서 책상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력이 훅 떨어졌다. :)

집에 책이 많지 않았는데 30권 정도 되는 세계명작을 다 외울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글자를 몰랐을 때에는 책에 그려진 그림들을 주의 깊게 보며 이야기를 상상했다. 어느날, 두 여자아이와 할아버지 그림이 나오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는데, 어느 페이지의 그림에서 두 소녀가 건초더미 위에 앉아 서로 째려보고 있었다. 나는 두 아이가 싸워서 서로 화가 나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갑자기, 글자를 읽게 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냥 글자가 읽혔다. 신이 나서 그동안 그림으로만 보았던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며 상상했던 이야기가 정말 그 이야기가 맞는지 궁금했다.

두 여자아이가 싸웠다고 생각한 그 책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였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둘이 싸우고 화가 나서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한 그림의 이야기는, 둘이 건초더미 위에서 프랑크프루트에 있었던 추억을 나누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싸움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무래도 삽화를 잘 못 그리신듯?????^^

그림이 잘못 전달한 상황을 글자는 오해없이 전달해 줄 수 있다. '글자는 대단한 거구나!' 강렬한 감동이 다가왔다.




초등시절 가장 좋아하던 책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다. 책이 별로 없었던 우리 집에 웬일로 이 책이 완역본으로, 그림 하나 없는 아주 두꺼운 책으로 있었다. 여기저기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읽어나 보려고 펼쳤는데, 내 평생 가장 아끼는 책이 되었다.

제제는 착하고 순수한 아이다. 하지만 악마가 그의 마음에 속삭이면 못된 장난을 치고야 만다. 장난의 결과가 너무 처참하여 크게 혼나고, 가족들에게 악마 같은 녀석으로 찍혀버리고 만다. 하지만 제제의 마음에는 천사도 있다. 구두를 닦아 아버지의 생일선물을 마련하고, 떠돌이 아저씨와 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노래의 선율에 빠져든다.

제제는 마치 나 같았다. 나도 악마가 속삭일 때가 있었고, 천사처럼 착할 때도 있었다. 이해받지 못하던 제제가 뽀르뚜가에게 사랑받고 이해받기 시작하자 기뻤다. 뽀르뚜가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밍기뉴만 볼 수 있었던 그의 진심을 보아주었다. 제제는 그에게 아들로 입양을 해달라는 부탁까지 하며 그를 아버지같이 사랑한다.

그러나... 따뜻하고 자애로운 뽀르뚜가는 갑자기 죽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제는 시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라임 오렌지 나무 밍기뉴도 어른이 되어 꽃을 피우고 그의 곁을 떠났다. 밍기뉴가 피운 첫 번째 꽃은, 제제에게 남기는 작별인사였다.

제제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랑받고 이해받던 두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을 뜻했다. 그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철이 든다는 것은 그토록 외롭고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수십 번 반복해서 읽으며 책 위에 많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도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 같았다.


책에서 감동을 느끼게 되자, 여기저기에서 책을 빌리고 구해서 더 많이 읽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뒤에 책을 펼쳐 놓고 몰래 읽었는데, 가끔 걸리곤 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께서는 썩 괜찮은 책들인걸 아시고는 크게 혼내시지는 않으셨다.

모파상의 '목걸이', '여인의 일생'을 읽으며 어떤 여자로 살 것인지 고민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세 가지 질문과 답에 대해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르나르의 '홍당무'를 읽으며 우리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리자 메리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읽으니 사이좋은 자매로 살고 싶고, 남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은 너무 재미있어서, 이 책 뿐 아니라 후속으로 나온 모든 시리즈를 다 읽었다. 다이애나 같은 친구를 가지고 싶었고, 앤과 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빨간 머리가 되고 싶었고, 길버트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다! 흠... 울 남편이.... 길버트랑 좀 비슷한 것도 같다.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제인 에어, 에덴의 동쪽, 노인과 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공감과 이해가 어려운 책들도 있었다. 주인공의 철학과 언어가 너무 어렵거나, 주인공의 가치관에 공감이 전혀 안되어 주인공의 행동에 반발심이 들기도 하였다.

데미안, 국가론, 오만과 편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곡, 위대한 개츠비....


또래보다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고 3 모의고서 국어 성적이 욕심만큼 나오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후에 독서와 수능성적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강연을 듣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충격이었다. 잠시 '책 읽을 시간에 문제집 한 권 더 풀걸.' 후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독서는 수능 국어성적보다 더 값진 것을 주었다는 걸 안다.

책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나에게 정말 많은 수다를 떨어준 친구이다.

겪어보지 않은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게 했으며, 옳고 그름의 가치관을 형성케 한 스승이다.

독서는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진실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나를 이끌었다.

갈 수 없는 과거와 볼 수 없는 미래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드라마 보더 더한 감동을 주었다.

한 때,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을 정도의 삶을 살았건만, 최근 15년 동안은 그렇지 못했다. 필요에 의한 책, 읽어야만 하는 책, 자녀를 위한 책, 자녀에게 읽어주려는 책만 읽었던 것 같다.


이제는 다시 한번 나를 위한 책들을 읽어보고자 마음을 먹는다. 책은 마음의 양식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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