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6남매의 장남이시다. 그리고 우리 집은 나와 언니, 여자만 둘이다. 한참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대였다. 내 친구 중에는 딸만 5-6명이 집안의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딸 여섯 중에 막내였던 친구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낳다가 자신이 태어난 거라며 담담한 얼굴로 말했었다. 얼른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어른들이 꽤 계셨고, 동생만큼은 아들을 낳겠다는 의지의 결과로 남자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들도 꽤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남동생이나 오빠의 밥을 차려주고, 남동생 노는 동안 청소, 빨래하는 친구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좀 달랐다. 딸만 둘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기독교라서 그런가? 아니면 교사이신 부모님이 앞선 가치관을 가지셔서 그랬나? 가정 내에서 여자아이라고 무시를 받아본 적은 없다.
다만 엄마가 해주셨던 이야기,
나를 뱃속에 가지시고 산부인과를 갔는데, 당시에는 초음파가 없어서 아이의 성별을 알 수가 없었다. 태아의 성별을 묻는 임산부에게 답하기 위해 의사 선생님은 청진기를 임산부의 배에 대고 한참을 들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이 심장소리가 씩씩한 걸 보니 아들인데요!"
엄마는 그 말을 믿고 내가 아들인 줄 알고 낳으셨다.
초등학생이 된 나에게 엄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딸인 거 알았으면 안 낳을 거야."
엄마에겐 그냥 옛날이야기였다. 나도 그냥 웃으면서 들으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왠지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는 씁쓸한 기억이다.
아빠는 나를 낳고 아들이 없지만 그만 낳기로 결심하셨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 한 그릇 배부르게 먹지 못한 어린 시절의 배고픔 때문이었다. 6남매의 장남이었지만 장남조차도 밥 한 그릇을 먹지 못해 그것이 평생의 한이었다. 어느 날 콩밥을 했는데 할머니가 그 콩밥을 한 그릇 퍼서 옆집에 주셨다. 이웃사촌 간의 오고 가는 정이었지만 어린 아빠는 그게 너무 화가 났다고 하셨다. 배가 고파서.
그러기에 아들을 낳아 대를 잇기보다는 딸 둘만이라도 배부르게 먹이고 싶으셨다. 그게 아빠의 소원이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다.
단칸방 샛집에서 살던 때가 기억이 난다. 비 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비가 새서, 떨어지는 빗방울 밑에 냄비를 놓았다. 똑! 똑! 밤새 비가 오는 날이면 떨어지는 물방울의 수가 늘어났고, 냄비의 수도 늘어났다. 식구들은 냄비를 피해를 여기저기 떨어져 얇은 이불을 휘감고 새우잠을 잤다.
엄마는 시골에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언니와 나를 보살피게 하고 출근을 하셨다. 나를 낳고 딱 일주일 쉬시고 바로 일을 나가셨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집에 와 보니 그 아이는 언니와 내가 먹을 분유를 먹어버리고 고향집으로 도망갔다. 엄마는 다시 시골에 가서 그 아이를 구슬리고 달래서 데리고 오셨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도 아이였을 뿐이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셔야 했다. 다들 그런 시절이었다. 언니는 그 당시 가장 쌌던 병설유치원을 다닐 돈이 없어서 국민학교 1학년을 두 번 다녔고 학교우유비를 낼 돈이 없어서 우유를 못 먹었다.
약간 철이 일찍 든 나는 소풍을 가는 날, 엄마가 쥐어주신 500원을 손에 꼭 쥐고 갔다가, 다시 손에 꼭 쥐고 돌아왔다. 친구들은 솜사탕도 사 먹고, 뽑기도 하고, 달고나도 먹었지만 난 단 한 번도 사 먹지 않았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을 한 번 갔었는데, 지금의 에버랜드인 '자연농원'이었다. 도착한 순간부터 나오는 순간까지 나는 엄마가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엄마가 점심때 우동을 사주셨는데 이 우동을 먹으면 우리 집이 망하는 거 아닐까 걱정했다. 그래도 너무나 맛있었다.
빛바랜 앨범
어느 날 집안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어두운 계단 옆 창고에서 빛바랜 앨범을 발견했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오래된 흑백 사진들을 구경했다. 언니와 나의 발가벗은 애기 때 사진, 갈대밭에서 머리에 갈대를 꽂고 노래를 부르는 내 사진, 언니가 나를 깔고 앉아 내 우유를 뺏어먹고 나는 그 밑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사진. 외가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사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는 사진.
그리고 그 사진들 사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없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이셨고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으셨고 당시 보기 드문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다고 했다. 엄마는 선비 같은 할아버지의 인격에 반해서 아빠가 할아버지를 닮아 인격이 훌륭할 거라고 믿고 결혼하셨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아빠는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 성격을 닮았었다고 한다. 속았다고 막 뭐라고 하셨다.
그 할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 A4 크기 정도의 누런 종이에 펜으로 빼곡하게 할아버지의 아들인, 나의 아빠에게 쓰신 편지였다.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편지였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헤이나가(내 이름) 딸인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키우거라.'는 문장이다. 정말로 내가 딸이어서 온 집안이 다 섭섭했었나 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도록 당부하셨다. 잘 키우라고 하시고 잘 크기를 바라셨다. 나는 그 문장 속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는 사진을 다시 찾아보며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을 살펴보았다. 차가운 흑백 사진이 따뜻해 보였다.
그 후 종종 앨범을 펼쳐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읽으며 왠지 모르게 그냥,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그 축복이 이어져 내려와 나도 축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고향집이 재개발되어 다 무너지고 그 위에 거대한 아파트가 세워졌다. 고향집이 철거되면서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은 거의 다 버려졌다. 아마 앨범도 그러할 듯하다. 하지만 글자로 남겨진 할아버지의 사랑은 손녀의 가슴에 40년 동안 살아남았다.
아마도 내가 지금 글을 쓰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한다.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 꼭 전달되야할 그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을까. 그에게 자신이 축복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