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발행된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이다. 대학 친구인 세 여성이 걸어가는 각기 다른 인생의 이야기를 여성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다. 오래되어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지금까지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있다. 잊히지 않는다. 작가님의 의도와 다소 다를지 모르나 나에게는 주체적인 인간상의 의미로 남아있다.
어릴 때부터 전업주부들의 가슴 아픈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꼭 커리어 우먼이 될 거라고 다짐했었다. 집안일을 여자가 하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가~' 혹은 '여자가 돼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은 다 싫어했다. 집안일 자체에 반감이 있었고 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대학교 4학년 즈음 교회 언니와 자취를 했다. 어느 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언니에게 말했다.
"왜 요리랑 설거지를 여자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여자, 남자를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간 있는 사람이 하면 되지."
!!! 큰 충격이었다. 그렇구나. 맞아! 시간이 있는 사람이 하면 되지. 남자 여자 따지지 말고 서로 도와주면서. 그게 평등이지.
남편은 내 평생 봐온 사람 중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결혼 후 10년 이상 주말에만 집에 왔고, 주말에 집에 왔다가도 전화가 오면 다시 뛰쳐나갔고, 집에서는 피곤해서 자거나 먹는데 시간을 거의 다 보냈다. 이런 사람이랑 살려니 당연하게도 내가 독박 육아와 독박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하지만 불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편이 집에 오기 싫어서 안 오는 게 아니고, 일찍 올 수 있는데 놀다가 늦게 오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도 일이 너무 많아 힘든 상태였다. 잠도 3-4시간 밖에 자지 못했고 일을 못하면 선배들에게 불려나가서 죽도록 혼이나 계단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나도 직장을 다니느라 힘들다. 하지만 남편보다는 자녀 양육과 집안일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가 여자라서 하는 게 아니라 남편이 너무 바빠서 시간이 더 많은 내가 하는 것이다.' 생각하며 노력했다.
남편은 나에게 "나 보고 싶지 않아?"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아주 살벌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 상태에서 보고 싶기까지 하면 힘들어져서 나 못 살아요. 난 감성적인 것과 관련된 생각을 아예 안 할 거니까 내가 보고 싶어 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요." 그러면 남편은 좀 섭섭해하면서도 그 말이 맞다고 인정을 하였다.
문제는 자녀 양육이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퇴근하는 아빠를 만나 함께 손잡고 집에 가는 다른 집 아이들을 보며 혹시 우리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을지 걱정이 되곤 했다. 아빠가 없으니 내가 아빠의 역할까지 하리라 다짐하면서 몸으로 놀아주려고 애썼다. 피곤했지만 틈나는 대로 박물관도 가고 전시회도 가고 숲 체험도 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혹은 잠든 아이를 안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서울 탐험을 했다. 이것저것 만들기도 많이 하고 책도 쉬지 않고 읽어주었다. 새벽에 갑자기 깨서 우는 둘째를 위해 아이들의 발밑에서 잠을 잤다. 나는 엄마이자 아빠이고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계속 세뇌시켰다.
울컥. 가끔씩 뭐가 속에서 올라올 때는 주문을 외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난 혼자서 다 할 수 있다. 난 강한 사람이다. 의지하지 않을 거다. 부러워하지도 않을 거다. 불평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내가 선택한 길임을 잊지 말자. 난 다 할 수 있다. 내가 다 해줄 거다.미쓰에이의 노래 가사 귀에 훅 박힌다. '나는 남자 없이 잘 살아~'
그럼에도 화가 나는 때가 있었다. 기껏 토요일에 집에 오더니 대학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했다. 잘 다녀오라고는 했지만 너무하는 것 같아서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일주일에 한번 오는데, 자기 자식이랑은 안 놀아주고 친구들이랑 놀러 가는구나. 그 친구들도 일 년 만에 만나는 거라는 건 안다. 머리는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많이 섭섭했다.
아이들은 아빠가 집에 없으니 아빠가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나는 아이들과 아빠가 사이좋게 지내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열심히 아빠 칭찬을 했다.
"아빠처럼 좋은 아빠가 세상에 없단다. 아빠는 너희를 잘 키우려고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어. 아빠는 성격이 좋아서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아. 아빠는 아주 똑똑해서 수학계산을 정말 빨리해. 아빠는 피곤하지만 너희랑 같이 놀고 싶어서 여행 계획을 열심히 세워. 아빠는 너희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늘 보고 싶어 해."
실제로 남편은 여름과 겨울에 휴가를 받으면 여행 계획을 열심히 세웠다. 나는 피곤해서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여행을 가기보다는 집에서 자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별 호응 없이 틈나는 대로 조는 병든 닭 같은 나와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시끄러운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운전을 했다. 그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였다.
그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지나고 드디어 2-3일에 한번 얼굴을 볼 수 있는 때가 왔다. 그리고 몇 년 뒤 매일 얼굴을 볼 수 있는 때도 왔다.
이제 아이들은 아빠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사라진다.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빠는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 좁은 집에 숨는 장소가 몇 개나 되겠는가. 늘 비슷한 곳에 숨는 아이들을 매번 신선한 방법으로 찾아줘야 한다.
아빠와 함께 하는 할리갈리는 전쟁이다. 순발력 만빵인 아빠는 9살 7살 딸아이에게도 절대 져주지 않는다. 종 치는 소리와 안타까운 비명소리가 난무하다. 막내가 이기고 싶어서 울지만, 그럼에도 절대 져주지 않는 게임에 진심인 아빠이다.
아빠는 배드민턴을 아주 잘 친다. 상대방이 공을 잘 받을 수 있게 공을 쳐준다. 그래서 아이들의 배드민턴 실력이 며칠 새 향상이 되었다.
아빠는 수영을 좋아하고 잘한다. 여행을 가면 꼭 아이들과 함께 수영을 한다. 수영을 싫어하는 나는 유리창 너머로 세 명이 함께 수영시합을 하는 것을 본다. 초등 5학년이 되니 막내가 제법 아빠를 따라잡는다. 녀석. 이제 안 울겠네.
어려웠던 시간들을 지혜롭게 헤쳐 나온 것 같아서 참으로 감사하다. 앞으로도 헤쳐나가야 할 사건과 세월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진심을 믿어준다면, 시간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시간이 없는 사람을 위해 조금 더 희생한다면, 그 희생을 알아주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남은 시간도 잘 헤쳐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