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넷, 비와 화해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비가 내립니다. 겨우내 지겹도록 쌓여 성가시게만 굴던 눈들이 이 비에 맥없이 녹아내리는 걸 보니,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봅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평생 비를 반겨본 적 없던 저에게는 참 낯설고도 귀한 아침입니다.
사실 저는 비가 오면 마음 한구석이 눅눅해지곤 했습니다. 남들은 빗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는데, 저에게는 정반대였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이유 모를 불안이 엄습했고, 노을이 붉게 지는 저녁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쓸쓸함의 시간이었지요.
그 이유를 압니다. 그건 제 나이 열 살, 한창 엄마의 품이 절실했던 그때부터 시작된 '엄마의 부재'의 흔적이었다는 것을요. 어느덧 일흔넷. 엄마의 부재를 말하며 옛날 일을 돌아보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처는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박제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삶의 마디마디마다 선명한 무늬가 되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맺힌 눈을 씻어내며 내리는 비가 왜 이리도 반가운 걸까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난 12월, 추위를 뚫고 이사 온 이 집에서의 시작이 왠지 좋을 것만 같다는 막연하고도 벅찬 예감 때문입니다. 평생 나를 울적하게 했던 비가, 오늘만큼은 과거의 묵은 슬픔을 씻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마중 나오는 **'축복의 전령'**처럼 느껴집니다.
일흔넷의 여인이 되어 다시 마주한 비. 이제는 비 오는 소리에서 불안이 아닌 평안을, 붉은 노을에서 쓸쓸함이 아닌 따스한 안식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창문 앞 나무에 연둣빛 잎새가 올라오듯 제 마음속에도 봄이 성큼 다가와 있겠지요.
오늘 아침의 이 기분 좋은 예감이, 제 남은 생의 매일매일이 되기를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