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안함이 자녀에게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
부모라는 이름은 참 무겁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기쁨과 동시에 '잘 키워야 한다'는 거대한 책임감을 선물 받습니다. 때로는 그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작은 실수나 허물들이 자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가 손흥민 선수와 그의 아버지 손웅정 씨의 이야기에 열광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완벽하게 설계된 훈련, 아들과 함께 뛰는 헌신, 그리고 "사람이 먼저"라는 확고한 철학. 그 훈훈한 부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부모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거울 앞에 선 우리의 초라한 뒷모습을 들여다보게도 만듭니다. "나는 과연 저런 부모인가?"라는 질문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성경 속의 영웅조차 부모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졌습니다.
성군이라 불렸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신앙적으로도 훌륭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자녀들의 갈등과 범죄 앞에 무기력한 아버지였습니다. 자녀들 사이에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그는 침묵했고 방관했습니다.
그가 왜 그랬을까요? 지혜가 부족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사랑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가 '죄책감'이라는 사슬이 되어, 정작 아버지가 나서야 할 때 그의 입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겠어"라는 그 마음이 결국 가정을 더 큰 비극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미안함은 때로 사랑의 가면을 쓰고 독(毒)이 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미안할 때, 그 마음을 '보상'으로 채우려 합니다. 자신의 이혼이 미안해서, 혹은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게 한이 되어서 무조건적인 물질이나 과한 허용을 베풀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부모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자기 위안'에 가깝습니다.
진정한 부모의 권위는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정직함'**에서 시작됩니다. "나도 참 모자란 사람이다. 하지만 이 길만큼은 네게 해롭단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정직한 고백이 자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기다림은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부모 노릇의 마지막을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다림'은 부모의 마음이 평온할 때만 가능합니다. 다윗이 도망갔던 아들 압살롬이 돌아왔을 때 그를 냉대했던 이유는, 아들의 잘못을 보면 자신의 과거(밧세바 사건)가 떠올라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책감에 갇힌 부모는 자녀를 기다려줄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아들을 보는 것 자체가 자신의 수치를 직면하는 고통이었기에, 다윗은 품어주는 대신 외면하고 분노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가 오늘의 나를 괴롭히게 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 자녀의 작은 실수에도 과하게 반응하거나 쉽게 조급해집니다.
내 실수가 자녀에게 대물림될까 봐 두려우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그 죄책감의 고리를 먼저 끊어내야 합니다. 부모인 내가 먼저 스스로를 용서하고 평안을 얻어야 비로소 자녀를 향한 '따뜻한 기다림'의 공간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용서하고 떳떳해질 때, 아이들은 부모의 '과거'가 아닌, 오늘 나를 온전히 기다려주는 부모의 '사랑'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