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매몰된 시민의 시선이 마땅히 머물렀으면 하는 곳은
처는 내가 잔소리가 많다고 자주 나무란다. "잔소리를 줄여야 집안이 평온하다"는 어머니의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결혼생활을 시작했건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매번 잔소리 그만하라는 처의 잔소리를 들을 적이면 잔소리는 원인에 대한 작용이기에 당신이 바뀌면 될 일이라고 응수했다. 처는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더는 이런 식의 응수가 무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잔소리 강도와 횟수를 줄이기로 했다. 의자를 책상 앞으로 당겨 앉고서 백지를 꺼내어 나의 잔소리를 적었다.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려고 했으나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참을 수 있는 잔소리와 참을 수 없는 잔소리를 대등하게 추려서 상호 합의를 보기로 했다. 양자는 서로 치열하게 지분을 다투었다. 난무하는 주장을 물리치고 각자가 하나씩을 추대하기로 중재한 끝에, 서로는 결론에 이르렀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잔소리는 '스마트폰'이었다. 정확히는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에 시선을 빼앗기는 행위'에 대한 제동이다. 처는 잠들기 전이나 눈을 뜬 직후, 불 꺼진 침실에서 스마트폰 속 활자에 몰입하곤 한다.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당신의 시력을 죽이는 일"이라는 나의 우려는 처제를 보며 확신으로 변했다. 십수 년 전 라섹 수술을 했던 처제가 최근 급격한 시력 저하로 다시 안경을 쓴 이유도 침대 위 스마트폰 습관 탓이었기 때문이다.
침대는 서로에게 집중해야 할 시공간이다. 그 귀한 주의력(Attention)을 알고리즘이 점유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가 아내에게 보낸 잔소리는 사실, 그녀의 시각적 주권을 되찾아주려는 애정적 간섭이었다.
이 사적인 불편함이 공적인 분노로 확장된 것은 최근 세종대로를 지나면서였다. 광화문에서 시청에 이르는 길 양쪽으로 들어선 빌딩의 외벽이 거대한 전광판으로 뒤덮이고 있다. 서울시는 이곳을 '미디어 랜드마크'로 조성해 도시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하고, 건물주는 광고 수익과 자산 가치 상승을 기대하며 이를 반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영상들 사이에서 정작 주인이어야 할 시민의 시선은 갈 곳을 잃는다.
전광판이 불편한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그리고 시민의 시선이 '비자발적'으로 탈취당하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시민의 무의식적인 시선을 자본화하여 광고주에게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선의 사유화'는 정당하지 않다. 건물주가 광고 수익의 일부를 세금이나 기금으로 환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이 누려야 시각적 주권의 상실 가치를 상쇄하는지 의문이다.
더 문제는 '시각의 매몰'이다. 세종대로는 경복궁부터 숭례문까지, 서울의 역사적 그리고 전통적 정체성이 응축된 구간이다. 전광판의 자극적인 빛에 시선을 빼앗기는 동안, 우리는 마땅히 향유할 국가 유산과 도시의 미를 놓친다.
여기에 안전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더해진다.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는 '스몸비'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운전자와 보행자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대형 미디어는 잠재적 사고의 트리거다. 도로교통공단의 경고처럼, 찰나의 시선 분산은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야간의 강렬한 빛 공해 역시 시민의 생체 리듬을 교란한다. 침대 위 스마트폰이 처제의 시력을 때렸듯이, 전광판은 시민과 도시의 건강을 해치는지 모른다.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나만 불편한 건가 싶어서, 집에서 하는 잔소리를 정말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