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욘
우여곡절 끝에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길 중 하나인 ‘프랑스길’의 출발점인 `생장 데 피데포르`로 가는 길 아침이다.
동트기 전 새벽녘부터 서둘러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나오니, 숙소 근처 풍경은 새벽어둠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머무는 며칠 동안 숙소 근처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서인지 어디가 어디인지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숙소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잠깐의 여유를 부리다가 기차역까지 택시로 편하게 갈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기차 출발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아 이른 아침 도시 풍경을 훑어보기 위해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배낭의 무게가 다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전날 기차역 약국에서 받은 신속항원검사 유효시간이 4시간도 채 남지 않아서 괜스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만약 기차를 타기 전 코로나 관련한 서류 검사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탑승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쩌지란 생각이 조금씩 생겼다.
어느 정도 익숙했던 거리를 벗어나자 여기가 어디지란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은 남아있었기에 나름 침착하게 지도 앱을 열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앱이 안내해 주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앱이 가리키는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분명 전날 코로나 검사도 할 겸 혹시나 해서 기차역을 찾아왔었는데, 지금 도착한 이곳은 분명 출발역인 몽파르나스 역이긴 했지만, 전날 왔었던 기차역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기차역이 아주 커서 그런지 입구가 여러 군데였나 보다. 이른 새벽이라 출근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기차역 입구로 들어올 순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순 없었다. 내가 어제 찾아온 역은 분명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굉장히 북적거리고 가게들도 스타벅스를 포함하여 많았었는데, 아무도 없는 어딘지 모르는 역 안에서 두리번거리며 안내판을 따라 걷다 보니 청소하고 계시는 역 직원분을 찾을 수 있었다. 기차출발 시간까지는 10-15분 정도 남아있었기에 마음은 굉장히 초조해져 있었다. 한 줄기 빛처럼 만난 직원분은 불어만 하시는 분이었지만, 내가 예약한 기차표를 보여주니 손으로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얼른 뛰어가라고 하시는 걸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있던 곳은 현재 운영을 안 하는 기차역의 구석이라는 걸 기차를 타고나서 들을 수 있었다. 난 직원분이 알려준 대로 허겁지겁 뛰어가니 저 건너편에 기차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저게 내가 타야 할 기차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난 있는 힘껏 뛰어가 코로나 서류 검사대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을 해결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기차역 직원이 내게 서류를 보여 달라했다. 난 속으로 ‘제발…아무 문제없기를….’이라고 빌며 서류를 보여줬다.
너무나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난 플랫폼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처음 타보는 프랑스 KTX인 TGV에 올라타 내 자리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난 후, 배낭을 짐칸에 실어 놓고서 잠시 한숨 돌리러 기차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보니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다들 바삐 어디론가 가는 게 꼭 출근길 여의도역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내가 뛰어온 길도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저 멀리 기차역 끝 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있는 플랫폼 쪽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역 자체도 조명이 굉장히 밝게 켜져 있었는데, 내가 들어온 곳은 정말이지 사람 한 명 없고 조명하나 켜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역시나 이번 여행은 만만찮은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약 두 시간 반 정도 기차를 타고 `바욘`이라는 프랑스 남부 끝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도착한 바욘이라는 곳은 파리와는 다르게 너무나 한적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장피데포르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한 시간가량 가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기차 시간이 4시간 정도 남아있어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 기차역 밖으로 나왔을 때, 너무나도 따뜻한 햇볕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 포근함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과 그간의 마음고생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의 포근함이었다. 역 앞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은 채 마음껏 햇살을 즐겼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기 시작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너무나 예쁜 카페들과 식당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에 빛나던 햇살 때문인지 유독 반짝이던 하얀 건물의 한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나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얼마 안 되어 카페 주인분이 주문한 커피와 동그란 초콜릿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초콜릿을 입에 넣고 커피 한 모금을 호로록 들이켰을 때, 뜨거운 커피가 입 안에 있던 초콜릿을 녹였다. 달고 쓰고를 번갈아 가는 기분 좋은 맛을 느끼며, 다시 한번 온몸으로 겨울날 따뜻한 햇볕을 맞을 수 있었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겨울날의 찬바람이 아닌 곧 봄이 오고 있다는 듯한 훈훈한 바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게 가장 혹독했던 겨울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