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01
충형씨를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숙소 앞에서 조그마한 와인을 함께 나눠 마시고 들어와 주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음날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께서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국분이세요?”
“네, 맞아요.”
“오 안녕하세요! 혼자 오신 거예요? 여기 와서 한국분 처음 봐요! 반가워요!”
“네, 저도 반가워요”
“방금 라면 끓였는데 좀 드실래요?”
“괜찮아요!”
“알겠어요. 그럼 저 라면 좀 가져올게요!”
괜찮다는 내 얘기를 듣고 알겠다며 아주머니는 다시 주방으로 가서 끓인 라면을 가지고 다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라면이 뜨거웠는지 호로록호로록 불어가며 먹더니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짧은 단발머리에 꽤나 깊은 주름이 곳곳에 있는 얼굴에서 어느 정도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말이 굉장히 빨랐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히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분의 한국이름은 유정이었고, 영어이름은 코니였다. 나이는 50이었으며 미국에서 오래 살아 현재 미국 국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에서 왔어요. 그쪽은요?”
“난 미국에서 왔어요. 사실 이번이 두 번째 까미노인데, 작년에 처음 왔을 때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걸었었는데, 그때 너무 좋아서 이번에 회사 휴가 내고 다시 오게 됐어요.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00km 정도이다. 이곳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걷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 이유로는 산티아고 순례길 증명서를 100km 이상 걸었을 때부터 인증서를 발급해 주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대단하세요. 전 여기까지 걷는 것도 엄청 힘들었는데..”
“요 며칠 날씨가 안 좋아서 더 그랬을 거예요. 비도 많이 오고 날도 춥고 했잖아요.”
그러긴 했다. 평소 걷는 거에는 누구보다 잘 걷는다고 생각했고, 등산을 하는 것 역시 즐겼던 터라 몰랐는데, 걷는 데에 있어 날씨가 많이 안 좋다 보니 아무래도 더 힘든 부분은 있었다.
“맞아요. 근데 그렇긴 해도 이 정도로 힘들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래도 이제 날이 점점 좋아진다고 하니 훨씬 더 좋아질 거예요! 라면 안 드셔도 괜찮아요? 저 많아서 드셔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 조금 이따 다른 한국분이랑 근처 마트에서 장 봐와서 저녁 먹기로 해서요”
“그래요? 한국분이 또 있어요? 너무 신기하다. 여기 오니깐 한국분들 많이 있네요!”
“그러게요.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는데, 오늘만 벌써 두 분이나 뵙네요”
“저도 마트 같이 가도 돼요? 씻고 나오니깐 너무 출출해서 라면하나로는 부족해서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아주머니가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먹을 때쯤 충형씨가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렇게 충형씨와 아주머니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 셋은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근처 마트로 갔다. 가는 동안 내내 아주머니는 쉬지 않고 이야기와 질문을 이어갔다. 덕분에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았다. 우린 마트에 도착해서 오늘 저녁으로 먹을 삼겹살과 샐러드를 카트에 넣고 와인 두병과 함께 주전부리로 먹을 과자와 햄을 챙겼다. 오늘의 저녁장을 다 고른 뒤 다음날 걸으며 각자 먹을 간식들까지 사고 나서 양손 가득히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뒤 고기를 구워 같이 장 봐온 샐러드와 함께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근데 순호 씨는 두 달 동안 휴가예요? 엄청 오래 계신다”
“아 휴가는 아니고요. 마침 시간이 조금 생기기도 했고 마냥 걷고 싶어서 오게 됐어요”
“그래요? 어떤 일 하시는데요?”
“개인 작업해요. 다른 일이랑 프로젝트들도 하면서 그림 그리고 있어요.”
“그림요? 멋있네요! 작업들 보여줄 수 있어요?”
“그럼요. 잠시만요”
난 충형씨와 아주머니에게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둘은 작업들을 보여줄 때마다 어떻게 한 건지 무슨 재료인지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에 대해 물었고, 난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면 귀찮은 일 일수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한국어로 나름의 깊이 있는 대화를 하다 보니 오히려 재밌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하신 것들이 많으셨는지 우리의 대화는 꽤나 긴 시간 이어졌다. 그 사이 전날에 만났던 리사도 우리 테이블에 앉아 같이 와인을 마시며 대화에 참여했다. 아주머니와 리사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리사를 만나 친해졌다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아주머니는 리사와 아무런 걸림돌 없이 대화가 가능했고, 중간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통역해주기도 했다.
숙소 주방에는 테이블이 여럿 있는 만큼 여러 국적의 순례자들이 많았다. 와인을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마트에서 사 온 와인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와인을 다 마셨을 때쯤, 다른 테이블에서 함께 마시자며 와인을 들고 와 우리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왔다.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주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술 한잔 하며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열흘이 조금 지났는데,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저녁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행을 오기 전에 내가 상상했던 여행과는 전혀 다르게 내 하루가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