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형과 박하 01
충형씨를 처음 만난 건 어느 정도 순례길에 적응을 한 후였다. '푸엔테 데 라이나'라는 마을에 도착한 이 날은 어김없이 비가 꽤나 오던 날이었다. 나는 다른 순례자들보다 일찍 출발하는 습관 때문에 그들보다 마을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가 오픈하기까지 아직 두어 시간 정도 남아서 근처 동네 펍을 찾아갔다. 지친 몸을 이끌고 펍에 들어서자마자 가게 구석에 배낭을 놓고 메뉴를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펍에는 주인처럼 보이는 스페인 아저씨 두 명과 젊은 남녀 한 명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카운터에서 꽤나 큰 소리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서로 뭔가 의견이 잘 맞지 않아 언쟁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가게 주인이 누구인지 한 명 한 명씩 얼굴과 차림새를 훑어본 후, 카운터 앞으로 가 가장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생맥주 한잔을 시켰다. 다행히 내 감이 맞았는지 아저씨는 굉장히 털털한 말투로 알겠으니 가서 앉아있으라고 했다. 맥주를 시켜놓고 카운터 유리안에 있던 여러 가지의 요깃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얼 고를지 한참을 고민하다 나는 익을 대로 익은 올리브가 섞여있는 올리브절임 한 접시와 내 호기심을 가장 자극했던 정어리 조림을 시켰다. 정어리 조림이라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티비나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여러 차례 접해 봐서인지 생긴 비주얼은 굉장히 난이도가 높아 보이는 음식 같았지만 언젠가는 꼭 한 번쯤은 맛보고 싶은 생각을 늘 했었다. 올리브절임과 정어리 조림은 땅과 바다라는 전혀 다른 고향으로부터 왔지만, 조림의 소스가 같아서인지 두 음식 모두 적당히 짭조름한 게 맥주를 마실 때 함께 곁들여 먹기 좋았다. 평소에 짠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하루를 걷고 난 다음에는 항상 짠 음식을 찾아 주문하곤 했다. 아직 겨울이었지만, 아무래도 걷는 동안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몸이 나도 모르게 짠 음식을 찾는다는 생각을 했다.
가게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곳에 오는 손님들이나 가게 주인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을 오기 전에도 지하철이나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가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보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내겐 더 재밌는 일이었다. 저 사람은 이 시간에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뭘까란 생각에서부터 저 둘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슨 일로 저런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을까. 다투고 있는 연인관계를 보면서 저들도 전에는 서로밖에 없는 사이지 않았을까. 무슨 일이 사랑하는 서로를 다투게 만들었을까란 고민들 등등..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다 보면 시간도 금세 지나갔다. 3-4시라는 어정쩡한 시간대에도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꽤나 있었다.
근처에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부터 트럭운전사, 청소부, 주변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일찍 퇴근한 것 같은 샐러리맨들까지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게 주인과 굉장히 친해 보였다.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정이나 말투 스킨십들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가족이라는 구성이 가장 중시되는 스페인 문화에서 이웃사촌들 역시 그 가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부분이라 그런 걸까 서로를 반갑게 대하는 모습들이 너무 좋아 보였고 한편으론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맥주 세 잔을 마시며 두어 시간쯤 머물다 알베르게 오픈 할 시간에 맞춰 가게를 나오니 다시 비가 오고 있었다. 알베르게 문 앞에는 이미 5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문 앞에 배낭을 놓아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5시가 되자 마을 중앙에 있는 성당에서 종이 울렸다. 정확히 몇 번이 울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차례의 종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자 알베르게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숙소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안으로 들였고, 우린 기다리던 순서대로 리셉션 앞에 있던 나무 벤치에 줄줄이 앉아있었다. 순서에 맞춰 도장을 받고 나서 각자의 짐을 들고 관리인이 각자 배정해 준 방과 침대를 찾아갔다. 난 내 침대를 찾아 배낭을 대충 집어던져놓고선 매트리스와 배게 커버를 대충 씌우고 비누와 수건을 챙겼다. 노곤하게 몸을 샤워를 하고 젖은 옷들을 세탁하고 나서 핸드폰과 담배를 챙겨 숙소 공용 식당으로 갔다.
알베르게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숙소 안의 공동 식당은 굉장히 넓었다. 적어도 20명?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난 식당 안 사람들이 모여있지 않은 한 구석을 찾아 앉아 다음날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다음 마을에 대한 숙소정보들을 찾다 담배 한 대 피우러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는 저물어 가고 있는 중이었고 오전부터 내리던 비는 아직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숙소 앞 난간에 걸터앉아 비구경을 하며 건너편을 보니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우비를 쓴 채 비를 맞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은 동양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몸에 비해 상당히 큰 머리였고 파마를 한 듯 굉장히 곱슬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며 옆에 놓인 배낭의 브랜드와 신고 있던 신발 브랜드를 보니 한국 사람이겠다 싶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은 아직 코로나가 위험한 때였지만, 이곳은 이미 코로나에 대해 크게 조심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그래서인지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다들 항상 들고 다니긴 했는데, 식당이나 어느 가게든 내부를 들어갈 때는 착용을 해야 했었다.) 그와 나는 당연히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고 서로를 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나와 비슷한 까무잡잡한 피부와 찢어졌으나 아주 작은 눈은 아니었으며 굉장히 큰 코와 입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얼굴과 행색은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